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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만의 첫 자취생활 in 제주

혼자 살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by 스텔라윤


"혼자 살아보지 않은 게 가장 아쉬워요."


20대 친구들이 20대를 돌아봤을 때 무엇이 가장 아쉽냐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나는 31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결혼했고 유학도 가지 않았기에 나 홀로 1 가구를 꾸리고 살아본 경험이 없었다.


'혼자 살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무얼 하며 지낼까.' 궁금했다. 물론 관계 속에서 알아차려지는 나도 있다. 하지만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나조차 몰랐던 내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고 나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제주에서의 10개월은 깜짝 선물처럼 주어진 인생 첫 자취의 기회였다. 제주살이를 시작하고 남편이 갑자기 서울에 취직하는 덕분에, 아니 취직하는 바람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나 혼자 제주 산다>가 시작되었다. 물론 싱글일 때 자취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겠지만, 연애/결혼이라는 카테고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더 홀가분했다.


나의 첫 자취방 in 제주


아무 계획 없이 제주살이를 시작한 나는 그때그때 본능적으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지냈다.


아침에 눈 뜨면 요가원으로 향했다. 마침 내가 지내던 원룸에서 차로 10분 거리에는 이효리 선생님의 요가원이 있었다. 요가원은 네이버 지도에서는 검색되지 않았고 동네 카페 사장님과 마을 도서관 사서님을 통해서 우연히 소개받았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낯선 요가원에, 그것도 요가 선생님이 우리가 아는 그 '이효리'인 곳을 나 혼자 찾아간다는 건 심장 떨리는 일이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다. 간판도 없는 나지막한 건물을 기웃거리며 들어가 수강 등록을 하고 어둑하고 고요함이 깔린 요가홀에 들어가니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존재감은 커다란 홀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녀의 눈동자는 우주처럼 깊었다. "처음 오셨어요?"라고 묻는 그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 의도치 않게 그녀의 말을 씹고 허둥지둥 요가매트를 펴고 앉았다.


요가원에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도 왔지만 요가 좀 해본 사람들이 그녀로부터 요가를 배우고 싶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자타공인 뻣뻣이인 나는 주눅이 들어 안 그래도 위로 솟은 어깨가 귀에 붙을 지경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단번에 알아본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내 몸이 되는 대로 하세요." 그녀의 말에 용기를 얻어 남 동작 흉내내기를 그만두고 어깨에 힘을 빼고 내 몸이 되는 대로 요가를 이어갔다. 지금도 유연한 사람들을 힐긋거리는 나를 알아차릴 때면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선생님이 이효리인 요가원에서 시작하는 아침이라.... 매우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나날이었다. 노래 가사처럼 그녀의 '몹시 진한 눈동자에 안개처럼 낮은 목소리'와 따뜻하고 사려 깊은 손길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비현실적인 제주 풍경과 일상


요가한 후에는 아침을 챙겨 먹고 무작정 걸었다. 육지에 살 때도 시도 때도 없이 걸었던 나는 제주에서도 어김없이 걷고 또 걸었다. 곶자왈을 걷고 오름을 걷고 바다 곁을 걷고 허허벌판을 걸었다. 아무런 일정이 없는 텅 빈 하루를 걷기로 채웠다. 걷기만 하다가 해가 저물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동장에서 친구들이랑 축구하며 머리카락 속까지 땀에 젖은 초등학생 남자아이처럼, 땀이 얼굴 위로 주르르 흐르는 채로 걸었다. 그런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주에 혼자 살며 나의 걷기 본능이 살아났다. 걷기를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제주에서의 걷기 생활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며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고요히 혼자 걸을 때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들이 있다. 내 안의 나는 꽤나 수줍은 편이라 오롯이 혼자 있을 때라야 나에게 말을 건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평소에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다. 내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와 걷는 시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참 동안 자연 속을 걷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고 싶은 본능이 살아났다. 눈이 확 뜨이게 하는 자연의 생생한 색감을 내 손으로 구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흘러넘쳤다. 특별히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옮겨 담기만 했을 뿐인데 아름다운 색감의 그림이 완성됐다. 내가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자연을 내 손으로 옮겨 담은 것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자연 곁을 걷고 그림을 그리면서 가만히 바라보고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제주에 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맑아지고 짙어졌다.


인간의 어떤 제도도 자연을 통제하거나 그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자연에는 또 다른 종류의 권리가 지배한다. 자연 속에서 나는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이 온통 사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난 맘껏 기지개를 켤 수도 없고 모든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세상은 내게 제약을 가하지만, 자연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세상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지만, 자연은 지금의 자연에 만족하게 한다.

_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문장들>


아이패드 드로잉 (2022)


그림을 그리고 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원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천읍 도서관이 있고 선흘리 마을 도서관도 있어서 부족함 없이 실컷 책을 읽었다. 아쉽게도 매일 글 쓰던 시절은 아니어서 뜨문뜨문 블로그에 일기 같은 글을 남기곤 했다. 제주살이 10개월을 몽땅 글로 남겼다면 얼마나 귀한 기록이 되었을까. 역시 글은 안 쓰면 손해다.


제주에서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 곁에서 살면서 문화, 예술, 교육에 대한 갈증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첫 자취생활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와 제주는 서로 결이 맞았다.


결국 34년 만의 첫 자취생활에 반전은 없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걷고 읽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관찰하고 감탄하고 사색하고 성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 한 사람이 편안하게 숨 쉬고 따뜻하게 자고 적당히 배부르게 먹기 위해서는 돈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내 행복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9년 전 무렵이다. 그 후로 나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에게 자주 물었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나의 대답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내 일상이 사치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치의 기준도 돈의 많고 적음의 기준도 행복의 기준도 저마다 다르기에 애초에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값이 쌀수록 더 안전하고 더 건전하다. (...) 우리 각자가 나아가야 할 필연적인 길은, 비록 풀밭 딱정벌레의 길처럼 겉보기엔 평범하고 모호해 보일지라도,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더없이 충만한 기쁨으로 향하는 길이다. 두더지와 버섯하고만 대화를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지라도, 자신의 부싯돌에 맞는 쇠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_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문장들>


이 풍경은 무료입니다


남편과는 매일 영상통화 하며 안부를 물었고 서로 번갈아 가며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났다. 오히려 좋았다. 연애할 때보다도 더 설렜다. 12년 전 연애를 시작한 후로 365일 거의 매일 만나다가 결혼한 우리에게는 큰 도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서로 씰룩대는 입꼬리를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이미 결혼생활을 경험해 본 후라 혼자 사는 삶의 자유가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남편도 좋아하는 주짓수를 실컷 하고 달리기도 하며 은근히 오랜만의 자취생활을 즐기는 듯 보였다.


제주에서 결혼 4주년 기념 사진


하지만 남편의 서울 자취생활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남편은 서울 신림동 빌라에서 월세로 살게 됐다. 남편 방은 3층이었고, 주인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4층에 살았다. 계약할 때 할아버지는 화장실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청소를 하라고 거듭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계약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입주하고 보니 벽지가 축축하고 방에서 꾸리꾸리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부지런히 환기시키고 화장실 구석구석을 솔질하며 찌든 때를 벗겨냈다. 남편의 방에 싱글침대와 출퇴근할 때 입을 새 옷을 채워주고 제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두 달 후, 다시 한번 서울에 갈 일정이 있어서 남편 방에 들렀는데 현관 천장에서 누런 콧물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께 이야기하니 4층 화장실에서 누수가 생긴 것 같다고 일단 곰팡이를 처리하라고 했다. 락스와 곰팡이 제거제를 총동원해서 곰팡이가 퍼지는 걸 막으려 애를 썼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전문 기술자이고 누수를 해결했으니 앞으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천장에서 떨어지는 콧물은 멈추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벽지를 교체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현관에서 시작한 곰팡이는 급기야 방 벽까지 번져나갔다.


곰팡이 핀 집에 남편을 살게 할 수 없어서 당장 신림동에서 방을 빼고 며칠 만에 천호동의 오피스텔로 집을 새로 구했다. 신림동 할아버지는 퇴거 청소비 5만 원까지 뜯어내고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입주할 때보다 퇴거할 때 집 상태가 더 깨끗했고 누수로 인한 손해배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역시나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심신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기로 선택하는 게 더 이로울 때가 있으니까.


트럭을 빌려 셀프로 이사하며 심신은 고되었지만, 우리는 또 한 번 단단해졌다. 곰팡이 핀 집에서 퇴거할 수 있고 이사할 집을 구했음에 감사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트럭 이사 중



제주에서의 10개월은 나에게 겨울이었다. 털어내고 휴식하는 시간이었다.


2018년 결혼 후 신혼집에 물난리가 났던 순간부터 30평 집에서 12평 집으로 이사한 것, 12평 집에 살며 코로나 시대에 자영업자로 살았던 시간,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했던 날들을 제주에서 휴식하며 모두 털어냈다.


제주에 혼자 살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돌보았다.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과 교감하며 내 안의 생명력을 충전했다. 자유롭고 행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고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이라는 게 너무도 분명해서 순간순간에 깨어있는 채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에 사는 동안 나의 의무는 순간을 오롯이 살아내는 것, 그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임무에 충실했다. 처음 혼자 살아보는 경험이라 서툰 점이 많았지만, 아쉬움은 없다. 남은 건 오직 감사함 뿐이다.


한겨울 추위처럼 내 삶을 응축시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공부다. 그 공부란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겨울은 자기를 제대로 들여다볼 거울을 만드는 공부의 절기라고 할 수 있다. (...) 쉼의 시간인 저녁과 겨울이 있는 이유다. 그래서 겨울은 이듬해 한 해 동안 살아갈 생명력을 온전하게 충전시키는 기간이다.

_유종반, <때를 알다 해를 살다>



제주의 자연이, 걷는 시간이, 무해한 존재들과의 만남이, 아무 계획 없는 쉼의 시간이, 읽고 쓰고 그리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시간이,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나를 일으켰다. 다시 두 다리에 힘이 실렸고 삶에 대한 열정으로 에너지가 샘솟았다. 제주에서 부유하는 수증기처럼 살았던 나는 다시 파도치는 바다로 기꺼이 뛰어들어 생동감 있게 살고 싶어졌다.


제주의 응원에 힘입어 겨울 같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진짜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 일찍 육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귤이 익어가고
제주 숲에 별사탕이 떨어지고
동백꽃이 피어나던 제주의 11월



이사하느라 지난주 연재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 아홉 번째 집입니다. 브런치북 <Home, Sweet Home>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이번 이사 과정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이사 스토리가 생겼음에 위안을 얻으며 아홉 번째 집 이야기도 차근차근 풀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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