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400평 정원 있는 오두막집에서 7평 원룸으로.
이삿짐은 리셋.
새로 이사한 집은 1층과 2층은 8가구 정도가 함께 살고 3층은 주인이 살고 있는 다가구 주택이었다. 주택과 붙어있는 또 다른 건물에는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다.
1층 공용출입구에 비밀번호 시스템이 있고 복도에는 CCTV도 있어서 혼자 살기에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차고지 증명을 할 수 있는 주차장도 있었다. (제주에서는 차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 차고지 증명을 해야 한다. / 예외사항 있음)
집주인은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인데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지금 강아지 소리 안 들리죠? 우리 강아지가 원래 내가 없으면 엄청 짖거든요. 지금도 분명히 짖고 있을 텐데 하나도 안 들리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주택에는 3층 주인집 강아지 말고도 1층 외부 울타리에서 사는 강아지가 5~6마리 더 있었다. 매일 하울링을 하고 어찌나 짖는지 바깥 샷시와 내부 샷시를 꽁꽁 닫아도 소용이 없었다. 매일 새벽 강아지들의 구슬픈 하울링으로 잠에서 깼다. 알람도 필요 없고 늦잠은 꿈도 못 꿨다. 별 수 있나. 집 안이 시끄러우니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했다.
이 원룸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두막 집에서 만난 고양이, 모아나와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집은 반려동물 한 마리까지는 허용되는 집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사 오고 나니 너른 자연에서 태어나 나무를 오르고 숲 속에서 뛰놀며 살았던 고양이를 내 마음 편하자고 7평 원룸에서 키우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모아나가 집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는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나 또한 제주까지 와서 원룸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모아나를 집으로 데려오는 대신 내가 모아나가 사는 동네에 놀러 가기로 했다. 다행히 차로 15분 정도 거리여서 매일 모아나 밥을 챙겨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루아침에 400평 정원은 사라졌지만, 좁은 원룸에 살았던 덕분에 오히려 더 부지런히 외출을 했다.
400평 정원이 사라진 대신 제주의 모든 자연이 나의 정원이 되었다. 제주 전체가 나의 집이 되어주었다. 숲, 오름, 바다에는 지붕도 없었지만 그 어떤 집보다 아늑하고 평안했다. 자연 속에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념무상 쉴 수 있었다.
숲 속을 거닐 때면 사람 만날 일도 거의 없고 가끔 마주치는 건 노루와 소뿐이었다. 오직 내 발자국 소리와 심장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파도치는 소리, 새소리만 들렸다. 온전한 평화였다.
한라산은 매일 봐도 안 질렸다. 볼 때마다 "우와, 멋있다."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한라산을 한눈에 담고 싶어 일부러 오름에 오르기도 했다. 한라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웅장해졌다. 마치 내가 큰 산이 된 듯 용기가 솟아났다.
자연과 가까이 지낼수록 무언가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었다.
자연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자연도 불완전한 그대로 완전한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자연 속에서 고요히 머무를 때면 종종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말인지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늘 내가 있는 그대로 충분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어쩌면 난생처음으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됐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그저 자연의 품에 머무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바다에 이끌려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어떤 거울보다도 분명하게,
바다는 우리가 누구인지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릭 루빈, <창조적 행위 : 존재의 방식>
원룸에 사는 동안 황당한 일도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8월의 어느 날,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돌아와 옷을 벗고 빨랫감을 챙겨 베란다로 나갔다. 샤워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릴 생각이었다. 습관적으로 베란다와 방 사이의 샷시를 닫았는데 '철컥' 소리와 함께 등골이 오싹했다. 샷시문은 집 안에서만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핸드폰도 방에 있었다. 황급히 세탁기를 정지시키고 이미 물에 젖은 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베란다 방충망까지 열어젖히고 최대한 얼굴을 내밀어 고요한 동네를 향해 소리쳤다.
조금 부끄러웠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큰 목소리를 내볼 일이 있었나 싶었다.
"저 000호예요! 베란다에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금방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구하러 와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옆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불과 우리 집 창문에서 스무 뼘 남짓한 거리였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창문도 열려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지금 옆집 사람의 발소리와 숟가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샷시를 닫아도 밖에서 매일 강아지들 짖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는데, 내 고함소리가 안 들린다고?'
끊임없이 소리친 지 1시간이 넘었을까, 창피함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탈수증상으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갔다. 점점 생존에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동네에 오직 내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 아무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베란다에 갇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독하게 살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독한 외로움이겠구나. 베란다에 잠깐 갇혀 있으면서도 내 존재에 반응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토록 외로운데.'
그때, 베란다에 둔 조명이 번뜩 생각났다. 부랴부랴 조명을 켜고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한번 목청껏 소리쳤다.
저 멀리 100미터 정도 떨어진 집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다급하게 다시 한번 소리치니 누군가 "기다려보세요!" 하더니 손전등을 들고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창문 아래까지 오신 아저씨한테 현관 비밀번호와 집 비밀번호를 알려드렸다. 선한 얼굴의 아저씨는 나를 구출해 주시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가셨다.
방에 들어와 냉장고에 있던 캔식혜를 원샷하고 가장 먼저 남편에게 전화했다. 남편은 얘기를 듣고 많이 속상해했다. 남편도 나도 왠지 마음이 씁쓸했지만, 내 실수이고 누구를 탓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처음 든 생각은 '와, 사람들 너무하네.'였다.
하지만 완전히 진정된 후 생각해 보니 나를 구하러 와준 사람이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었다. 엄청난 행운이다. 최악의 경우 다음 날 구출됐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면 얼마나 심신이 피폐했을까. 1시간 만에 구출된 건 당연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나를 구하러 와준 아저씨도 캄캄한 창문 뒤 낯선 실루엣을 돕겠다고 나서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남편과 함께 아저씨네 집에 찾아가 감사인사를 전하고 작은 성의표시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몸이 놀랐는지 몸살기운이 있었고 하루 종일 집에서 쉬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옷을 챙겨 입고 바다로 갔다.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한참을 걸었다. 걷다 보니 몸과 마음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너무도 쉽게 씻겨 내려갔다. 제주에 살면서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때면 늘 자연의 품으로 도망쳤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연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금세 괜찮아졌다.
어느 날은 평소처럼 산책하는데 하나의 문장이 바람처럼 내 귓가를 스쳤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문장이 날아가버릴까 봐 계속 곱씹고 소리 내어 말했다.
연고 없는 제주에서 혼자 살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고 자연과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선명하게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두려움이 한 꺼풀 더 벗겨졌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서 살든, 내 몸 마음 영혼이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에 온전하게 살아있다면, 나는 언제나 괜찮을 수 있구나.' 안전하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자주 이사하며 낯선 집,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에 적응하며 살아야 했고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을 겪을 때마다 늘 숨 쉬며 지금 여기로 돌아왔다. 내 몸 마음 영혼을 지금 여기로 조율했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괜찮았다.
제주의 광활한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과 연결되는 느낌,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느낌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연습했다. 그런 덕에 지금은 도시에 있지만, 산책하며 만나는 풀잎, 나무, 바람,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연결되어 살아간다. 10분 만에 달려가 안길 바다는 없지만, 제주의 바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파도가 치는 듯 시원하다.
그래, 낙원은 없어.
네 발 밑을 봐.
그곳이 전부란다.
심흥아, <나는 토토입니다>
낙원은 언제나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에 있다. 다른 곳을 찾아 헤매도 영영 낙원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오직 '지금' 뿐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