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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을 수 없는 나의 첫 번째 임대인

엄마와의 제주 사계절 여행

by 스텔라윤


<Home, Sweet Home>을 연재하며 그동안 거쳐온 집들을 다시 떠올려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첫 번째 임대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나의 첫 번째 임대인은 엄마였구나.'


나는 엄마 뱃속의 아기집에서 약 10개월을 세입자로 지냈다.


계약서 작성도 없었고, 보증금도 월세도 없었다. 나의 첫 번째 임대인이 기꺼이 허락해 준 덕에 나는 10개월 동안 무전취식하며 지냈다. 임대인은 아무 대가도 없이 심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나를 품어주었다. 따뜻한 집을 내어주고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 다행히 나는 아기집에 있을 때도 세상에 나왔을 때도 순하고 민폐 끼치지 않는 세입자였다고 한다.


엄마 뱃속에서 방을 뺀 후에도 30년 가까이 엄마는 나를 무료로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살게 된 집에는 엄마와 공동명의자인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고, 먼저 세 들어 살고 있던 오빠라는 존재가 있었다. 또, 3년 후에는 또 다른 세입자가 등장했는데 그는 나의 남동생이 되었다.


얼굴은 많이 닮았지만 가지각색의 성향을 가진 다섯 명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집에 20년 넘게 함께 살았다. 세 명의 세입자들은 먹여주고 입혀주는 임대인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보통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가 원만하기가 쉽지 않듯이 우리 다섯 명도 지지고 볶는 애증의 관계였다.


특히 엄마와 나는 그다지 성격이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엄마는 감성적인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엄마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성별이 같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로 만나기 이전에 우리는 정희자와 박서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이었다.


나는 엄마라는 존재가 자식에게 사랑이든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엄마 또한 자식이라는 존재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은혜를 갚으리라고 기대하며 살았을 것이다. 기대감을 내려놓고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수용하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제주에서 살았던 10개월은 내가 엄마를 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 이제 곧 수국이 만개할 것 같은데, 올래?"

"엄마 지금 억새가 너무 예쁜데, 올래?"

"엄마 뭐 특별히 할 거 없으면 올래?"


엄마는 계절마다 제주에 왔다. 비행기 티켓만 예매해 주면 경기도 하남에서 제주도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제주 공항에 엄마를 데리러 가는 길은 늘 설렜다. 작은 캐리어를 끌고 제주에 도착한 엄마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엄마는 열악한 오두막 집의 난방텐트에서도 꿀잠을 자고 아침에는 여유롭게 정원을 거닐었다.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400평의 야생정원은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밤에는 모닥불에 발을 쬐며 시커멓게 타버려서 먹을 것도 없는 군고구마를 앞니로 긁어먹으면서 깔깔 웃었다.



남편이 서울에 취직을 하고 나 혼자 제주 원룸에 살게 된 이후로 엄마는 더 부지런히 놀러 왔다. 7평 원룸은 엄마와 둘이 여행하며 머물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둘 다 잠버릇이 없어서 슈퍼싱글 사이즈의 매트리스에서도 서로 부대낌 없이 숙면했다.


나는 기꺼이 엄마의 전용 운전기사가 되었고 우리는 제주의 동서남북을 누비며 제주의 사계절을 만끽했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봄에는 벚꽃과 유채꽃을, 여름에는 수국을, 가을에는 핑크뮬리와 억새밭을 찾아다녔다.



"엄마 사진 찍어줄게. 거기 서봐."


엄마는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엄마의 찍사를 자청했다. 제주살이 하는 동안 엄마의 사진이 켜켜이 쌓였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부지런히 나를 찍어주고 손글씨로 기록하며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결혼하며 챙겨 온 서너 권의 벽돌 같은 앨범은 이사 다닐 때마다 은근히 짐이 되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다.



엄마는 걸핏하면 펄쩍펄쩍 점프를 했다. 엄마의 이토록 커다란 웃음과 방방 뛰는 발걸음을 본 적이 있었던가. 세입자 셋을 키우며 30년 동안 살기에만 바빠 웃음을 잊었던 엄마는 여행하며 너무도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운전 배워놓길 잘했지, 제주살이 하길 잘했지.' 싶었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나이의 왕초보 운전시절부터 우리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운전대에 코를 박고 벌벌 떨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엄마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는 내가 운전하는 차로 엄마를 여행시켜 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늘 다섯 명이 북적거리며 살았기에, 엄마와 둘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고된 세상살이는 육지에 잠시 내려놓고 우리는 낯선 제주에서 신나게 놀았다. 어릴 적 친구와 하루 종일 놀아도 헤어지고 나면 금세 또 놀고 싶은 것처럼, 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며칠을 내리 놀고도 엄마가 육지로 돌아가는 날이 되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제주는 넉넉함으로 엄마와 나를 품어주었다.


엄마와 딸이라는 특별한 사이로 만났지만 서로 날 세우고 상처 주며 살았던 날들이 많았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상처받은 마음도 치유되었다.


제주의 풍경을 담으려 집중하는 엄마의 눈동자와 말간 웃음을 바라보며 행복했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가족으로 함께 살아온 세월이 4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엄마의 시간은 절반을 훌쩍 넘겼고,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내 마음은 대책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엄마의 품을 떠난 지 벌써 7년. 내 방 하나도 야무지게 정리하지 못했던 나인데 결혼하고 숱하게 이사하며 이제 나도 한 가정을 품는 존재가 되었다. 가족 안에서 늘 외롭다 느꼈기에 결혼할 때도 섭섭함 없이 홀가분하기만 했고 이제는 남편과 꾸린 우리 집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 곁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안도감이 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고 먹이고 키워 준 나의 첫 번째 임대인, 엄마라는 존재는 제주 바다보다도 넓고 깊다.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도 나의 첫 번째 집, 나의 첫 번째 임대인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엄마가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를, 자유롭기를.



[쿠키]

세 명의 세입자가 모두 독립한 후 엄마는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는 듯했으나, 곧이어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났다. 치명적인 귀여움을 앞세워 등장한 그는 우리의 뒤를 이어 엄마 집에서 무전취식 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 집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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