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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오피스텔의 배신

결로+누전+녹물 3종 세트

by 스텔라윤


2022년 3월, 400평 정원의 오두막 집에서 시작한 제주살이는 2022년 12월, 7평 원룸에서 끝이 났다.



짐을 모두 비우고 나니 내가 살았던 흔적이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언제 이 집에 살았었나,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랑한 함덕 바다와 영원한 내 사랑, 모아나
소울푸드, 에그 샌드위치


제주에 올 때는 남편과 함께였지만 육지로 돌아갈 때는 1년 치 짐을 테트리스 하듯 차에 싣고 배를 타고 목포로 가서, 목포에서 또 서울까지 가는 그 모든 여정을 나 혼자 해내야 했다.


야무지게 짐을 싸고 차를 배에 싣고 장시간 운전을 해서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 뭔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Home, Sweet Home> 3화에서 내가 휘몰아치듯 한꺼번에 샀던 세 채의 아파트 중 한 채는 제주에 오기 전에 팔았고, 한 채는 여전히 세입자가 살고 있었으며, 분양권이었던 나머지 한 채는 내가 제주에 사는 동안 완공이 되어 세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집 두 채가 있었지만, 정작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는 없어서 월세로 집을 구해야 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신축으로 가자."


신혼집이었던 30평 빌라에서의 물난리, 30년 넘은 12평의 복도식 구축 아파트, 지붕에서 물이 새고 진드기가 떨어졌던 제주 오두막, 남편이 살았던 신림 빌라에서의 콧물 같은 누수까지.... 집에서의 생고생에 이골이 난 우리는 이제는 좀 깨끗하고 편안한 집에서 살고 싶었다.


우리의 자금으로 신축을 찾는 건 흔히 말하듯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곧 죽어도 신축에 살겠다는 마음에 분당 근처의 약간 고립된 동네의 신축 오피스텔을 선택했다. 주방 겸 거실과 화장실 하나, 거실 옆에 문간방처럼 딸린 자그마한 공간이 있는 7평 남짓한 정말 작은 집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신축이라는 사실이 그 모든 불편함을 상쇄해 주리라 믿었다.


광각으로 찍으니 널찍해보이는 집 / 둘이 누우면 꽉 차는 방 하나


마지막 셀프 이사가 되기를 바라며


집은 작았지만 층고가 높고 창문이 천장 높이까지 뚫려있어서 집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집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작은 집의 갑갑함을 덜어주었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금세 새로운 집에 적응했고 나는 부지런히 짐을 정리해서 스윗홈을 만들어나갔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집
Home, Sweet Home


하지만 어쩐 일인지 좀처럼 집 안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2월의 집 안 온도는 16도~17도를 맴돌았다. 제주도 오두막 집에서 썼던 난방텐트를 다시 꺼냈다. 추운 것뿐만 아니라 커다란 창문에서는 결로현상으로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심지어 창문 옆 벽에서도 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신축까지 물이 따라왔네...."


물이라면 이골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비닐 돗자리가 수맥을 막아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이소에서 은색 비닐 돗자리를 사다가 이불 밑에 깔았다. 비닐 돗자리와 난방텐트를 방패 삼아 잠을 잤고, 아침마다 벽지에서 흥건하게 흐르는 물을 수건으로 닦아내고 환기시켰다. 실소가 나왔다.


결국 결로 문제는 벽 단열시공을 다시 해야 했고 우리는 시공사로부터 호텔비를 지원받고 하루 집을 비웠다. 서울의 남편 회사와 가까운 곳에 10만 원 이하의 호텔을 겨우 찾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집을 내어주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집을 비웠는데 시공사에서는 마치 우리의 호캉스라도 지원해 주는 양 생색을 냈다.


집이 울고 있다
수맥을 막아준다는(?) 은색 돗자리
제주에서 온 난방텐트


문제는 결로뿐이 아니었다. 한밤중에 정전이 발생하는 날도 있었다. 눈발 날리는 2월, 안 그래도 보일러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추운데 정전으로 셧다운 되고 나면 집은 순식간에 냉장고처럼 식어버렸다. 관리실에 연락하니 담당자들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찾아왔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입주한 후로 매일 아침 하자센터에 찾아가는 게 나의 일이었다.


"집이 너무 추워요. 결로도 너무 심해요. 어제는 정전이 됐다니까요...."


집에는 허구한 날 하자보수팀이 들락거렸고 정전의 원인은 천장의 누전 때문이라고 했다.


"누전이요? 누전이면 화재 위험이 있는 거 아닌가요?"

"일단 천장 위에 고여있는 물은 다 닦아냈으니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정전이 있었고 심지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걸 직관하기도 했다.


매일 하자 보수하던 나날


또 한 가지, 신축인데 녹물이 나왔다. 새하얀 샤워기 필터가 금세 누렇게 변했고 녹물의 원인에 대해서는 시공사 측도 지자체 측도 본인들의 탓이 아니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미뤘다. 신축이라 안정화될 때까지 두어 달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말뿐이었다.



물론 마음 고생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이 자그마한 집에서 소꿉놀이 하듯 일상을 꾸려갔다.


크리스마스에는 집 크기에 비해 널찍하게 빠진 주방에서 남편이 케이크를 구워주기도 했고, 아늑한 난방텐트를 영화관 삼아 영화도 즐겨봤다. 신축답게 집 안 곳곳에 켜켜이 묵은 때가 없고 건조기와 시스템 에어컨이 옵션으로 들어가 있어서 하자만 없으면 나름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이었다.


우리 집 제빵사
난방텐트 속 영화관 / Netflix, <트루 스피릿>


하지만 얼마 후, 화룡점정으로 7평 코딱지만 한 집의 관리비가 40만 원이 나왔다. 월세가 50만 원인데 관리비가 40만 원이라니, 보일러 빵빵하게 틀면서 훈훈하게 산 것도 아니고 추워서 덜덜 떨면서 살았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결심했다. '너무 유난스러운 거 아니야?' 할 수 있지만, 도저히 이 집에서 살아갈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애써 괜찮은 척해보았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계절마다 어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막연함에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시공사에게 그동안의 불편함과 하자들을 호소했고 담당자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의외로 흔쾌히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다. 과다하게 청구된 관리비와 녹물로 인한 필터비용, 중개수수료, 이사비 등을 감안해서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는 말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 후로 매일 부동산 매물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집을 보러 다녔다. 동시에 도서관에서 풍수지리 카테고리의 책을 찾아 읽었다. 아파트에 배산임수와 같은 조건을 적용하기는 애매하겠지만 좋은 집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하지만 쉽사리 집을 선택할 수 없었다. 예산 안에 맞는 집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겉모습만 보고는 짐작할 수 없는 집의 맨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불안했다. 신축 오피스텔이 결로, 누전, 녹물이라는 맨얼굴을 감추고 있을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선택하는 집마다 왜 이런 걸까, 대체 어떤 집을 선택해야 할까, 어려웠다. 또 한편 그동안 늘 내가 집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집이 나를 선택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은색 비닐 돗자리 위, 난방텐트 속에 누워 뒤척거리다가 남편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냥 당분간 여기에 살까? 이제 날 풀리면 추운 것도 덜해질 거잖아. 너무 집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 지치기도 했고...."

"그러자. 나는 다 괜찮아."


'진짜 그만하자.' 싶은 마음으로 핸드폰을 손에서 놓기 전, 습관처럼 부동산 어플을 켰는데 뜨끈한 신규 매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내가 원하던 동네, 내가 원하던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바로 중개사에게 문자를 보냈고 시간이 늦어 다음 날 아침에나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전화가 왔다.


"이 매물 진짜 있는 건가요?"

"네! 그럼요."


경쾌한 공인중개사의 목소리에 내심 설레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집을 보러 가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 딱 여기까지만 보고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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