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are all lovable.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낯선 나를 사랑해 주었다.
덕분에 나도 발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발리는 그곳에 두고 온 추억이 많아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 다시 가지 않을 수 없는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크리스탈(Krystal)과의 신기한 인연
우리는 2016년 7월 한국의 명상센터에서 만났다. 열흘간의 묵언수행 후 침묵이 해제된 마지막 날, 우연히 크리스탈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남자친구(현 남편)와 세계여행 중이었다. 그리고 한국 다음 여행지는 발리라고 했다. 나 또한 명상센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발리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발리에서 다시 만났다. 아름다운 얼굴만큼 마음도 아름다웠던 크리스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인연이었다.
꾸따에서 만난 아리(Ari)와 븨븨(Vivi)
혼자 꾸따 시내를 걷다가 아리의 작업실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걸음을 멈추고 아리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런 나를 발견한 아리는 가까이 와서 봐도 된다며, 자기 작업실 공간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 후로 아리의 작업실은 참새 방앗간 같은 곳이 되었다.
심심할 때마다 아리의 작업실에 갔다. 아리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아내가 가져다주는 약간의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줄담배와 커피가 아리의 주식이었다. 그런 아리 옆에서 나도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아리의 또 다른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아리의 아내인 븨븨(Vivi)가 마을 잔치에 초대해 줘서 현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생활환경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네 가족이 살았다. 물론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생활수준이 다르겠지만 아리와 븨븨는 그렇게 살았다. 마을 사람들끼리 공동 주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공동 마당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븨븨가 나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역시나, "노 프라블럼(No Problem)~"
2018년, 남편과 다시 찾아갔던 아리의 작업실. 꾸따 거리는 2년 전에 비해 복잡해지고 삭막한 분위기였지만, 아리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아리가 입고 있는 옷도 거의 비슷하다.... 잠깐 인사만 하고 와서 미안하고 아쉬웠다. 올해 발리에 갔을 때는 꾸따에 가지 않아 아리와 븨븨를 만나지 못했다. 다음에는 선물 한 보따리 사들고 가고 싶다.
멘장안 숙소에서 만난 와얀(Wayan)
와얀은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멘장안의 시골 동네에 리조트가 들어오면서 운 좋게 취직을 했다고 한다. 리조트에서 무료로 다이빙 자격증을 마스터까지 따고 영어공부도 혼자 열심히 해서 인정받았다고. 이제는 다이버로 활동하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와얀은 이 모든 게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아들 셋 아버지 와얀, 따뜻한 미소를 가진 사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바람 구름 민재 민주네 집
바람(아내) 구름(남편)님은 민재(아들) 민주(딸)와 함께 발리로 이주해서 민박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2016년 나 홀로 발리여행을 갔다가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온라인에서 우연히 바람구름님네를 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연락을 드렸는데 바람님, 구름님, 민재까지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와주었다. 그 후로도 바람님은 나를 위해 라면을 끓여주시고, 오토바이 운전을 못하는 나를 태우고 마트며 가야젤라토며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셨다. 민재 민주와 피자도 시켜 먹고 삼겹살도 구워 먹었던 날들, 참 귀한 추억이다.
2018년, 2년 전의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 남편과 함께 다시 바람구름님네를 찾았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민재는 또 다른 해외로 대학을 갔고, 바람구름님도 한국으로 돌아왔다. 발리의 첫 번째 고향 같은 곳이었는데, 아쉽지만 그래서 더 진한 추억으로 남았다.
바람님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민주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민주와 서울 데이트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
마데 패밀리 (Made's Family)
2018년, 우연히 찾아간 우붓의 민박집.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던 그곳, 마데의 집이다. 알 수 없는 친근함으로 가까워진 마데의 가족들. 이곳에는 마데, 마데의 아내, 마데의 어머니, 마데의 아들이 살고 있다. 깊이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매일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2024년, 다시 찾은 마데네 집에서 열흘을 지냈다. 6년 전에는 며칠 스쳐가는 인연이었기에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데는 우리를 기억해 주었다. 마데는 쿨남이다. 영어도 잘하고 몸에 여유와 매너가 배어있다. 마데는 평소에는 수수한 숙소 주인처럼 보이지만, 한 지역의 장을 맡고 있고 꽤나 큰 부와 명예를 갖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늘 겸손하고 친절하다.
에피소드 with 마데
#1
6년 전, 우리는 우붓에 있는 마데의 집에서 체크아웃하고 꾸따에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내 실수로 방 키를 꾸따까지 가져와버렸다. 바로 마데에게 연락했고, 마데는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꾸따까지 사람을 보내서 키를 가져갔다. 우붓에서 꾸따까지 2시간은 걸리고 택시비로 2~3만 원은 나오는 거리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고마웠다.
#2
마데는 늘 우리 편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준다. 6년 전 남편이 마데네 집 앞 슈퍼에서 5천 원을 내야 하는데 지폐를 헷갈려 5만 원을 내고 온 적이 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물론 우리의 잘못인 걸 알고 있기에 할 말은 없지만 마데에게 속상함을 토로했다. 마데는 슈퍼 주인에게 가서 "우리를 찾은 손님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며 일침을 놓았다.
#3
올해 발리에 갔을 때도 오토바이 헬맷을 마사지샵 프론트에 맡겼는데 직원의 착오로 다른 사람이 우리의 헬맷을 가져가버린 일이 있었다. 마사지샵 직원들은 "방법이 없다."라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고 혹시 헬맷이 돌아오면 연락을 주겠다며 오토바이 렌탈샵에 이야기를 전하라고 했다. 우리는 마데 숙소를 통해서 오토바이를 빌렸기 때문에 마데에게 연락했고, 마데는 직접 마사지샵 직원과 통화하며 "그건 너희의 부주의함 때문이다."라며 영어도 서툴고 발리어도 하지 못하는 우리 대신할 말을 해주었다. 다행히 잠시 후 헬맷이 돌아왔고, 별 탈 없이 상황은 종료됐다. 마데에게 헬맷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니 마데는 특유의 쿨한 말투로 말했다. "Oh, that's a good news!" 마데 덕분에 여러 위기 상황에서도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마데의 가족들은 우리를 대할 때 늘 공손하고 친절한 표정과 말투,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틱톡과 인스타그램에 가보면 반전 그 자체이다. 마데는 발리의 노홍철이라 불러도 될 만큼 흥이 많고 춤을 잘 춘다. 발리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전통 춤을 배우기에 다들 춤을 출 줄 알지만, 마데의 춤실력은 예사롭지 않다. 남편과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마데의 틱톡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보, 우리도 이렇게 살자. 순간에 충실하고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자. 진짜로." 신 앞에서 겸손하고 일상에 충실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들, 화는 감추지만 흥은 마음껏 뽐내는 사람들, 삶의 순간순간을 즐기는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
브리노의 존재는 발리에 머무는 동안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브리노뿐만 아니라 발리 사람들을 닮아 여유로운 발리의 동물들, 존재 자체로 마음을 녹이는 생명체들, 그들 덕분에 여행하며 웃을 일이 더 많았다.
Thnaks to
#1 낯선 우리에게 빛나는 웃음을 나눠준, 스쳐간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다.
#2 나의 전용 오토바이 기사. 오토바이 운전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도 잘하고, 나와 입맛도 비슷하고, 아무 데서나 잘 자는 사람.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 사랑스러운 여행메이트, 남편에게 감사하다.
#3 용기 있는 사람,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고생스러운 상황도 즐길 줄 아는 사람, 끝내는 웃고야 마는 사람. 좌충우돌 우당탕탕 인생을 달게 살아가는 사람, 나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우리를 받아준 발리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 발리의 모든 신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