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리
지난 세 번의 발리 여행에서는 그저 즐기기에 바빴다. 올 9월, 다시 발리를 여행하며 문득 궁금했다.
'이렇게 불편하고 개발도 안되고 비위생적인 발리에 오면 왜 마음이 편안한 거지?"
오토바이를 타고 날 것 그대로의 발리를 바라보다가, 내 질문 속에도 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낮은 건물들, 마을 잔치, 광활한 자연, 자연의 흐름에 맞춘 생활습관 등등. 나는 경험해 본 적 없지만 개발되기 이전의 한국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국은 편리하고 쾌적하지만 긴장감이 맴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무엇을 내어준 걸까? 혹시 자유로움, 여유로움, 마음의 평화 같은 건 아닐까.
13화에 걸쳐 구구절절 쓴 대로 발리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발리에 대한 환상만 갖고 발리에 도착한 순간 나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뭐야.... 천국 같은 발리라더니, 천국이 왜 이래?'
양심상 적나라한 발리의 모습을 밝히며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교통체증
발리의 교통체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도로 위에 차와 오토바이가 한가득이다. 질서 정연하지 않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교통체증을 짜증스럽게 여기는 순간, 발리를 여행하는 내내 짜증과 피로가 따라다닐 것이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정신없는 발리의 도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로 위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해 보자.
매연
"여보 나 손톱이 왜이렇게 새카맣지?" 의아했다. 발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팔을 긁어보자. 손톱이 새까맣게 변한다....
담배연기
놀랍게도 발리에서는 여전히 실내에서 담배를 피운다. 카페와 식당도 예외가 아니다. 흡연자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지만 비흡연자는 난감하다. 한국 담배에 비해서 담배냄새가 덜 지독한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담배는 담배일 뿐.
자외선
6년 전, 발리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며 난생처음 얼굴에 주근깨가 생겼다. 발리의 날씨가 한국의 여름보다 오히려 덜 덥게 느껴질 때도 있다. 건기에 가면 그렇다. 하지만 발리의 태양은 강렬하다. 자외선에 민감하다면, 한국에서보다는 철저히 태양을 피해야 할 것이다.
위생
발리 식당에서는 나무 테이블 위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야외 식당에서 식사하면 파리가 떼로 몰려오기도 한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현지 식당에 간다면 대체로 그렇다. 식당과 숙소 벽에는 찍짝(도마뱀)이 기어 다닌다. 성인남성 엄지발가락보다 큰 바퀴벌레도 식당과 숙소에 종종 출몰한다.
현지 식당에 가면 손으로 음식을 담아주는 곳도 있다. 발리 사람들은 여전히 손으로 식사하기에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여러가지 이유로 발리에 간 여행자들은 종종 '발리밸리'를 앓는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말했듯 우리는 발리에 네 번 가는 동안 발리밸리를 아직은 경험하지 않았다. 나도 깨끗하고 위생적이고 쾌적한 환경을 당연히 좋아하지만, 발리에 가면 그냥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게 나의 몸과 마음에 이롭다.
걷기 열악한 발리
발리는 사람이 다니는 길도 좁다. 그나마 있는 길은 잘 정돈되어 있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현지인들의 90%는 쪼리를 신고 여행자들도 절반 이상 쪼리를 신지만,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는 운동화를 꼭 챙겨가도록 하자.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
8년 전 혼자 발리에 갔을 때 발리 남자들이 던지는 추파에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나를 "달링~"이라고 부른다던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뜬금없이 입술을 오므려 공중으로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불쾌했다. 하지만 현지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장난스럽고 약간은 저질스러운 문화를 알게 된 후로는 무시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발리남 : 이 음료수 먹을래?
나 : 괜찮아. 너무 달아서.
발리남 : 쏘 스윗~? 나처럼~?
이 또한 벌써 8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만약 혼자 여행하며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면 당황하지 말고 '응 아저씨, 갈 길 가세요.' 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해주자. 단, 선을 넘으면 단호하게 무시하자. 받아주면 한술 더 뜬다.
무뚝뚝한 사람들
"발리 사람들 친절하다더니 왜 저렇게 무뚝뚝해 보여?" 발리 사람들은 평소에 의외로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웃지 않으면 '화가 난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뚝뚝한 얼굴 속에 환한 웃음이 숨겨져 있다. 내가 먼저 웃어도 좋지만, 먼저 웃어 보이지 않아도 눈이 마주치면 대부분 그들이 먼저 웃어준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발리의 매력에 빠지면 또 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라오라병을 앓고 있는 많은 이들에 의해 검증된 사실이다. 한 번의 여행으로 발리의 매력을 다 알기란 쉽지 않다. 차근차근 하나씩, 발리에서 나만의 기쁨을 발견해 보자.
여행은 삶을 다채롭게 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 있을 때만 즐거워서는 안 된다. 여행하며 느끼고 배운 삶의 여유와 자유, 다채로운 감정을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여행하는 것도 지금의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함이니까.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건 늘 지금, 여기니까.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서 삶을 만끽해야 한다.
발리에서 느낀 여유와 자유를 한국의 일상에서도 누리며 살려고 노력한다. 주말 아침이면 눈 뜨자마자 남편과 커피를 마시러 간다. 발리 카페에서 느꼈던 여유로움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으로 불러온다. 남편은 운전할 때 화내는 일이 줄었다. 발리 도로 위 무질서 속의 평화를 경험하고 많이 느긋해졌다. 일상에 충실하되 자유롭게 즐기며 살아가는 발리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리도 하루하루에 충실하고 더 많이 웃고 춤추며 지낸다.
지금 여기에서도 행복하지만, 발리의 자유로움에 흠뻑 빠져들고 싶을 때 우리는 또다시 발리에 갈 것이다.
<발리의 무시무시한 오라오라병> 연재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