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용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보뽈로니오 Sep 17. 2017

천천히 한 걸음씩

여섯 번째 이야기. 차파다 지아만치나(Chapada diamantina)

  해인이는 베네수엘라 로라이마 산을 트래킹 한 무용담을 꺼내는 걸 좋아했다. 여러 명의 여행자들이 한 팀을 꾸려 일주일 넘는 대자연 속을 걷고 왔다는 이야기는 아직 '소국'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 나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에서 당장 집 밖으로 나가 한 방향으로 일주일만 걷다 보면 어떻게든 한쪽 바다에 닿을 수 있을 테다. 무거운 백팩에 모든 짐과 일주일간 먹을 음식을 짊어진 채, 목표로 하는 멋진 경치 한순간을 위해 걷기만 한다는 트래킹은 찰나를 위해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일처럼 여겨졌다. 말하는 대부분의 무용담은 고생담이었음에도 해인이는 트래킹을 할만한 곳이 있으면 꼭 다시 하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인내는 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도 이러는 걸 보면 트래킹에는 알 수 없는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의 첫 트래킹 코스로 찾은 곳은 바이아 주의 Chapada diamantina 국립공원, 너무 크다. 26개 주 중에 하나일 뿐인데 우리나라의 5배는 족히 넘는 바이아 주였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불곰국, 천조국, 대륙, 그 바로 아래 이 브라질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짧은 삼박사일 트래킹을 떠났다.


  뻔한 비유지만 트래킹은 정말 인생을 닮았다. 닿지도 않을 저 멀리서 보이는 절경에 이끌려 기약 없이 그쪽으로 걸어간다. 계속해서 걷다 보면 내가 아까 보던, 지금은 또 누군가가 보고 있을 절경 속에 어느새 놓여 있다. 하지만 내 눈 바로 앞에 보이는 건 지루하고 숱하게 본 흔한 풀포기들이다. 바라던 곳에 와있는데도 그렇게까지 좋은 지도 애매하고 오히려 여길 떠나 편한 숙소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어쩌다 한 번씩 포인트가 나오면 소름 돋을 정도로 멋진 절경이 나오지만 그 순간은 대개는 아주 짧다.


  우리는 가이드 루아에게 다음 포인트까지 몇 시간 남았는지 묻는 대신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만난 지 6개월 되었지만 아직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25년의 진도를 따라잡으려면 할 말이 많았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에피소드부터 비교적 최근의 일까지 서로의 인생을 5년 단위로 끊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서로가 아는 짜증 나는 인간들을 소환해 씹어대고 각자의 살아온 배경과 만났던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서로의 안 좋은 습관들과 엉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들을 꽤나 솔직하게 털어냈다.


   다만 이때 너무 지나치게 솔직하긴 했다. 내가 어떤 연애를 해왔는지, 그때 어딜 가서 뭘 했는지 따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됐었다. 해인이가 너무 쿨해서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나도 해인이의 옛 연애를 듣는 게 재밌어서 서로 재밌게 이야기했더니, 어느새 해인이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있었다. 그 뒤 해인이는 한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하며 나를 괴롭혔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우리가 데이트할 수 없는 곳이 너무나 많아졌다.


  빛나는 순간을 위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것도 좋다. 합당한 보상으로 꿈같은 절경을 만끽하는 것은 달콤했지만 그 순간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만 힘겹게 한걸음 더 내딛으면서도 해인과 눈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가던 순간은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 장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