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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보뽈로니오 Sep 03. 2017

언어 장벽

다섯 번째 이야기. 모로 지 상파울루(Morro de São Paulo)

 모로 지 상파울루, 브라질레이루들도 이곳에 가기 위해 살바도르를 거친다고 한다. 브라질 동북부에 보석처럼 박힌 이 작은 섬은 주변 바다가 너무도 얕아 한참을 걸어 나가도 깊이가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다. 섬에 도착해서 처음 해변에 나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멀리 나가 있는 것 같아서 놀랐는데, 여기 사람들은 해변을 Praia(해변)이라고 하지 않고 Piscina(수영장)이라고 부를 만큼 얕아서 괜찮단다. 해변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Piscina에서는 물 위에 동동 뜬 노점상? 에서 맥주와 안주를 스티로폼에 띄워 팔고 있었다.


하루 온 종일 해변에서 하는 futevolei. 브라질이 왜 브라질이겠나.

 

 투명하게 맑은 대서양 바다에 느긋한 사람들, 시원한 맥주까지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휴양지 었지만 반대로 내 속은 문드러져있었다. 여행 시작부터 천천히 나를 거슬리게 하던 것이 3주 정도 지나자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모로 지 상파울루로 오는 배에서 해인과 나는 마드리드에서 온 여행자를 만나 말을 섞었다. 그녀는 모로 지 상파울루가 너무 좋아 이미 세 달째 머물고 있는 여행자로 잠시 섬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섬 구석구석의 명소와 맛집에 대해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한 꿀팁을 전해줬는데, 문제는 그 꿀팁을 해인은 굳이! 스페인어로 받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분명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역시 스페인어가 더 편했고 배를 타고 오는 몇 시간 내내 자연스럽게 나는 대화에서 사라져 갔다.....


 여행 초반에도 나는 해인이 조금은 배려해주기를 바랐다. 외국 여행이라고는 10년 전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 친구네 대학생 형 누나들을 따라서 한 달 호주 여행을 가본 게 전부였고 그래 봤자 따라만 다녔으니, 일 년 동안이나 휴학하고 배낭여행을 쏘다닌 해인만큼 영어도 편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편하게 하는 해인도 배낭여행 초기에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입에 붙이는데 고생을 했다고 하니 나는 해인이가 좀 더 나를 끼워주고 천천히 도와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나온 3주 동안 해인은 갓 데뷔한 예능인처럼 멘트 따먹기를 시전 했다. 대화 속 해인의 웃음은 '니 분량은 네가 챙겨야지... 프로는 못하면 잘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모로 지 상파울루의 해인. 저 웃음은 나를 비웃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내 실력을 탓하고 노력으로 메워야 했지만, 매일 밤 자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조금은 해인을 원망해오던 내 앞에서 굳이 스페인어를 써서 나를 웃을 줄만 아는 놈으로 만든 해인은 결정적으로 나를 섭섭하게 했다. 나는 묘한 열등감에 더해 내가 삐져있는 사실 자체가 또 싫어서 두 번 세 번 꼬여있었다. 섬에 도착해 입을 닫고 묵묵히 걷던 내 낯빛을 뒤늦게야 확인한 해인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내 눈치를 슬슬 보고 있었다.


 결국 꿀팁을 받아 도착한 식당에서 나는 최대한 안 궁 해 보이게 나의 속상함을 설명하려고 온갖 포장을 해댔다. 나도 배낭여행을 하고 싶어서 왔고, 나도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든 눈을 맞추고 소통했을 것이었고, 굳이 나를 배려 안 하는 게 섭섭하고, 네가 만약 이랬고 내가 너였으면 어쩌고 저쩌고, 했지만 그냥 그건 열등감이었다. 없어 보이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없어 보였다. 어차피 내가 더 말을 편하게 하는 건 금방 되는 일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영어가 잘 안 먹히는 남미 여행에서 해인이의 스페인어는 나에게 백번 고마운 존재였다. 해인이가 없었으면 사실 이 식당도 못 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대강 눈치를 챈 해인은 앞으로 좀 더 나를 돕겠다고 했다. 창피했지만 인정하고 솔직히 섭섭하다고 말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천천히 해결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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