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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샘 Jun 24. 2024

'느림'의 미학

조금 느려도 괜찮은 이유



느렸고, 여전히 느린 자의 고백


    고백하건대, 어린 시절 엄마의 속을 많이 터트린 전적이 있다. 밥을 늦게 먹어서, 등교 준비를 늦게 해서, 성격이 느긋해서(느긋하다는 이유만으로 등짝을 맞아 본 경험이 있는지?). 성인이 되고 어쩌다 교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지금도, 엄마를 시험에 들게 했던 나의 느긋한 성격여전하다. 달라진 것이라면 책임지고 해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기에, 이제는 스스로를 닦달하며(!) 사람 구실은 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점이다. 어릴 때 내가 그렇게도 느렸었나? 자문해 보아도 답은 알 방도가 없다. 그저 매 년, 새로이 만나는 아이들 가운데 '느린' 아이를 만나게 되면 나도 저렇게 느렸었나? 하고 같은 질문을 떠올릴 뿐이다.


    느린 아이들을 사랑한다. 자세히 말하면 고유한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언제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경험한 바에 따르면 느린 아이들에게는 특유의 세심함과 꼼꼼함, 그리고 성실함과 사려 깊음의 미덕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작은 것들에도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진정한 여유(왠지 모르게 반어적 표현 같지만 진심이다!)'가 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나의 '느림'의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지나가는 질문일 누군가의 'Small Talk'에도 최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고자 고민하고, 그럼에도 마음에 쏙 드는 답을 찾지 못해 얼굴만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때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었을 것이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빨리빨리'를 미덕으로 삼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어쩌면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효용성을 의심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느림'에도 이유가 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정한 나름의 교사 백서 중 하나, '속도가 느린 아이를 마주하게 되면, 느림의 이유를 살펴보자'. 주의가 산만해서, 혹은 주변 영향을 잘 받는 성향이라서 과제 수행 속도가 느린 아이라면, '느림'의 원인을 제거해 주고 꾸준히 지도할 필요가 있다(자리 바꿔주기, 환기시키기, 지속적 관찰 및 피드백 제공하기 등등). 하지만 분명 성실한 태도로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느린 아이라면, 아이의 '타고난 속도'가 느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느림의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고, 아이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타고난 속도가 느린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충분히 기다려주되 독촉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적절한 개입을 한다, 고 답하고 싶다.)


    '타고난 속도가 느린 아이들'은 사실 굉장히 성실한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완벽주의 성향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겠지만, 교사의 입장에서 그런 아이들을 찬찬히 관찰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식의 감동은 어쩌면 성인들의 세상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종류의 감동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가장 느린 아이


    이제껏 내가 본 중 가장 느린 아이이자, 느린 속도만큼 깊고 진한 감동을 선물한 아이였던 '상현이(당연 가명이다.)'를 떠올려 본다. 얼마나 느렸는가 하면 상현이는 심지어 말하는 속도까지도 느린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시간이 1초 남짓일 때, 상현이의 '선. 생. 님.'은 거의 3초 정도였다면 믿겠는가. '상현이의 느림'은 이미 유명해서(?) 아이들은 상현이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해낼 때 오히려 놀라워했다.


    그런 상현이가 1학기 학급 임원 선거에 출마하여,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후보자 공약 발표를 마치고 부회장이 되었다. 상현이의 공약은 '깨끗한 교실 만들기'였다. 깨끗한 교실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할 뿐 아니라 공부를 더 잘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기에, 상현이는 앞장서 깨끗한 교실을 만드는 부회장이 되고 싶다고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공약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하교 전에 매일 교실 청소를 하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공약이었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상현이가 부회장이 되어 진심으로 기뻤다. 참 감동스러웠다. 아이들도 상현이의 성실함과 사려 깊음을 알고, 인정해 준 것만 같아서였다. 상현이에겐 자신을 당선시켜 준 공약을 지키려는 '의지'와, 그것을 꼭 지키고 싶어 하는 '책임감'이 있었다.


어떤 감동


    밥을 먹는 속도도, 자리를 정리하는 속도도, 청소를 하는 속도도 느렸기에 '가장 늦게 하교하는 상현이'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어느 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교실에서 세상 느린 혼잣말로 '아이~ 학원 늦었는데, 큰 일 났네.'하고 중얼거리는 상현이를 보기 전까지는. 늦었다, 큰일 났다는 말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상현이의 말하는 속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었다. (상현이가 저 문장을 중얼거렸던 속도를 상상해 보고, 최대한 느리게 읽어 보시라.)


    대충 보니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되었기에, 나는 웃으며 상현이에게 말했다.

  "상현아, 그 정도면 청소 잘한 것 같은데 이제 바로 학원으로 출발해 볼까? 학원까지 얼마나 걸리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제 자리 청소는 다 했는데요. 그게... 친구들 자리 중 아직 더러운 곳이 있어서 청소를 하느라구요. 학원은 5분이면 가는데, 아직 청소가 다 안 됐어요."

  한 손에는 물티슈를, 다른 한 손에는 쓰레기를 들고 있는 상현이. 그 모습에 퍼뜩 상현이의 공약이 떠올랐다. 어느덧 4월 중순인데, 그간 상현이의 늦은 하교는 모두 공약 때문이었을까?


  "상현아, 그럼 이제껏 매일 친구들 자리를 청소하느라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거야?"

  나의 놀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현이는 씩 웃으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 선생님.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왜냐면 청소 때문도 맞긴 하지만, 청소가 아니어도 제가 원래 느리거든요."


  상현이의 웃는 얼굴을 가득 채운 감정은 '순도 100%의 뿌듯함'이었다. 아이의 순수한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다른 친구들에게도 책임감을 일깨워 주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에구, 상현이가 약속을 잘 지키려 이제껏 매일 친구들 자리까지 청소를 했구나. 선생님이 몰랐네. 그런데 상현아 어쩌지? 선생님은 깨끗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서 상현이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같이 노력을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벌써 3학년인데, 친구들도 자기 자리를 정돈하는 법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짐짓 고민되는 표정으로 상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상현이는 얼마간 망설이다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친구들을 이르려고 하는 건 아닌데요. 이제까지 청소를 해 보니까, 사실 쓰레기가 나오는 자리는 거의 정해져 있더라구요. 청소하는 게 싫지는 않았는데, 선생님 말씀처럼 친구들도 청소를 깨끗이 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고민이 되는 게요. 저는 제가 한 공약을 어떻게 지키죠?"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으로 진한 감동을 선물하는 상현이. 상현이의 얼굴이 별처럼 반짝였다.



소중한 꼬마 선생님


    다음 날, 아이들에게 상현이의 공약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나는 그간 상현이가 공약을 지키기 위해 혼자 남아 매일 우리 교실청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상현이를 보았다. 어떤 아이들은 상현이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고, 어떤 아이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나는 상현이가 한 행동이 바로 '책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자신의 자리를 책임감 있게 스스로 청소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또한 상현이가 '깨끗한 교실'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고 하여, 상현이 혼자서 교실을 청소할 의무는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의 교실'이기에, 청소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따라서 상현이가 직접 청소를 하지 않더라도, 깨끗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 친구들을 독려하는 것도 어쩌면 공약을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나도 매 년 낯선 교실에서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 상현이와 나의 만남이 필연은 아니었기에 나는 처음부터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현이를 볼 때면 나는, 책임을 다 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상현이는 수업 중 만나는 그저 그런 문제 하나도 허투루 푸는 법이 없었다. 혹시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면 상현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민되는 표정과 난처하단 얼굴을 하고서도 과제를 해결해 내려 노력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 노력하는 상현이를 보는 시간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어쩌면 상현이는 나의 꼬마 선생님이 되어 주려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일까?


그 모습 그대로


     종업식 날, 상현이는 여전히 느린 말투로 "선생님, 그동안 가르쳐 주셔 감사했습니다. 4학년에 가서도 열심히 해 볼게요."하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세상에 다양한 학생이 있듯 다양한 교실도 있기에 '상현이의 느림'은 어느 교실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멀리 나갈 것도 없이 당장 상현이의 부모님께서도 아이의 느림을 걱정하곤 하셨으니, 어쩌면 상현이의 속도도 점차 빨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빠른 상현이'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다. 어쩌면 상현이는 느리기에 더 빛났을 것이다.


    나는 상현이의 인사를 기쁜 마음으로 받으며, 상현이라면 4학년에 가서도 충분히 잘할 것이란 진심 어린 응원으로 답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상현이만큼은 자신의 속도가 아닌 잠재력을, 그 충만함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길 기원했다.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노력한대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상현이만의 진정성을 떠올려 본다. 상현이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드는 생각. 상현이와 같은 이유로 느린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속도 그대로 성장하길,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물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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