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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Nov 16. 2024

여행자의 태도

떠나기위한 여행이 아닌, 잘 돌아오기위한 여행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 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 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 한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 나기 위해서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 한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에서는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제주 여행을 다녀왔어요. 2박3일의 짧은 여행이었고, 물론 혼자 가지 않았습니다. 제주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예요. 마음의 병이 시작되고나서 처음, 제주로 여행을 갔던 때가 떠오르네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내 발목을 잡는 검은 늪과 내앞에 자꾸만 드리우는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내가 만든 지옥은 상황이었지만 그땐 그게 장소인줄만 알았고, 떠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러지 못했죠. 가진 게 있었으니 잃을 게 있었고, 그건 다른게 아니라 내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을 가족이었어요. 긴 터널을 지나게 만들었던 공무원, 이라는 직도 있었죠. 그 이유들만으로도 저는 실행보다는 안주가, 도전보다는 안전이, 용기보다는 체념이 더 잘 어울리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적당한 여행지가 제주였어요. 서울에서부터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 그러나 아주 멀리 떠났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 곳, 다시 돌아갈 여지는 반드시 남겨져 있는 곳, 한발은 위태롭게라도 걸치고 있을 수 있는 곳, 떠났다는 느낌도 주긴 하지만 떠남과 동시에 돌아옴을 포함하고 있는 곳. 거기가 제주였어요. 맞아요. 솔직해지자면, 홀연히 외국으로 날라버릴 용기가 제겐 없었던거죠. 우울과 무기력이 지속되던 날들중 잠깐씩 해가 들거나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마르는 날이 있었고, 저는 그때마다 충동적으로 제주행 티켓을 예매했어요. 물론 떠나는 날 검고 짙은 구름이 드리우기도 했지만, 떠난다는 사실이 저를 기어코 공항으로 움직이게 하더라구요.


그때는 떠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잊기위해 여행 일정을 짜는 일에 골몰했더랬어요. 새로운 곳, 특이한 상점, 핫한 공간들로 일정을 빼곡히 채우고 쉴 틈없이 재게 몸을 움직였던 것 같아요. 파워 P인 인간이 유일하게 J로 돌변하는 순간, 그 순간을 선물하는 게 저에게는 제주였어요. 그렇게 저는 제주에 1년에 한차례에서 많으면 세차례 정도를 다녀왔고, 여행지에서는 어김없이 돌아가고싶지 않은 나,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은 나와 싸워야 했습니다.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잊어야 했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벅찬 일정을 짰고, 여행의 피로도역시 그에 비례해 높아졌지만 집으로 돌아가고싶지 않은 마음을 상쇄시키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에 돌아오면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당연하죠. 제 바꾼 것이 없는데 무언가 달라졌을 리가요. 그러면 저는 또 좌절과 무기력 속을 헤맸어요. 그만큼 바람을 쐬고 왔으면 됐지, 그정도로 쉬었으면 만족해야지, 평생 놀고 먹으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 라며 여전히 그대로인 나에 대한 자괴감을 가장 크게 느꼈고, 그건 곧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어졌지만, 그 미안함도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이었어요. 일단 내 마음이 지옥이니까, 내 몸이 무기력하니까 분노와 슬픔이 미암함을 압도하더라구요.


언젠가, 남편이 물었어요.


"넌 뭘하면 즐거워?"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하려다가 좌절하지 말고, 우울하다고 우울속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남은 육아휴직을 쓰게 되면 그땐 하고싶었던 걸 해보라고, 너를 위한 시간을 써보라고 얘기해주더라구요. 좋아하는 것들 재미있는 일들로 하루를 채워보라고. 사실, 제가 우울과 불안, 무기력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낀 데는 남편도 한몫을 하고 있었거든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남으로 느닷없이 이사를 가자고 했던 그, 그걸 기필코 실행에 옮긴 그, 이사와서 외롭고 힘들어하는 저를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라고 다그쳤던 그, 다 마음먹기에 달린 일인데 복에 겨워서 그렇다던 그였기에 일단은 미웠고, 니 말만은 절대로 안듣겠다는 고집도 조금은 있었지만, 깊은 불안과 우울에서 빠져나오고 싶던 저는 뭐라도 해야 했어요. 평생을 이런 기분으로 살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었겠죠. 어느날 진지하게, 남편이 물었던 질문을 되뇌어보게 되었어요.


"너는 뭘 하면 즐겁니?"

"네 인생의 낙은 무엇이니?"


그리하여

"너는 어떤 불꽃앞에서 춤추는 인간이니?"

에 이르며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저를 다그쳐도 보고 타일러도 보고  방치도 해봤던 남편이 이제 저를 가장 많이 저를 도와주었어요. 운동을 했고, 가깝고 먼 곳들로 여행을 떠났고, 크고 작은 맛집과 멋집을 다니기도 했으며,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고, 글도 써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놀랍게도 조금씩 천천히 느리게 오래도록 늪에서 걸어나오게 되었어요.


https://brunch.co.kr/@inthegarden/97

https://brunch.co.kr/@inthegarden/98

(그 글은 여기)


이 얘기를 왜 하게 되었냐구요? 안간힘을 쓰며 떠나고자 했던 여행이 이제는 잘 돌아오기위해 한템포 쉬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끼는, 그런 여행이었거든요. 이번 제주여행이. 무리해서 잡는 일정과 계획이 아니라, 잘 누리기위해 내려놓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걸, 익숙한 것들을 보고, 듣고, 맡으며 느꼈어요. 밤바람에 대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부비적대는 소리, 새벽부터 나를 깨우는 새소리와 간조를 지나서 열렸던 바닷길이 조금씩 닫힐 때 성큼 내발치까지 다가온 바닷물이 찰방대는 소리,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그 위에 나지막히 얹어지는 엄마의 투박한 사투리, 밟을때마다 서걱이는 마른 잔디소리까지, 제주에 가면 늘 들었던 소리들이었지만 느끼지 못했던 그 소리들에 집중하니 마음이 차분하고 정갈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의 정념과 잡생각이 사라지더라구요.


그것은 조금의 멈춤도 허용하지 않는, 오직 변화할 뿐인 하늘이었다. 붉은색인가 싶으면 푸른색이었고, 여기까지인가 싶으면 무한히 뻗어나갔다. 하늘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시야는 더 넓어졌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이토록 광대한가 싶어 놀랐다. 그건 공간적인 광대함만은 아니었다.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마음을 비우고 비운 마음을 곁에있는 것들로 채우니 김연수 작가가 말한 공간과 시간의 광활함을 품은 밤하늘이 제 눈앞에도 펼쳐졌어요. 장작을 태우는 불길을 휘감았다가 흩뿌리고 이내 사라지는 바람의 방향을 보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해질무렵의 노을과, 노을 아래 제자리를 찾아 눕는 갈대들도 눈에 들어왔어요. 어디부터 을 띄기 시작해서 어디까지가 에메랄드 인지, 또 그 뒤로 어디까지가 푸른빛인지 알 수 없이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끝간 데 없는 바다 선을 그어보며 색의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도 했답니다.  


친정엄마와 그런 것들을 함께 보고 느끼면서 제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뭔줄 아세요?


"엄마, 나 서울가면 00하려구."


찬찬히 제주의 자연과 함께 머무르며 저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은 뒤에라야 새로운 것들을 담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배운거 같아요. 당연히 짧은 이번 여행만으로 느끼게 된 것들은 아닙니다. 예전에 다녔던 여행에서 이번 여행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변해가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니 그렇더라구요. 잊어야, 기억할 수 있게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어요. 지워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 집에 돌아오니, 전처럼 내마음이 똑같아서 우울하고 슬프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온전하고 안녕히 보존되어 있는 나의 자리와, 내 일상이 조금 거짓말을 보태서 얘기하자면 눈물겹게 감사하더라구요. 골프 연습을 일주일 가까이 쉬었으니, 실력이 줄었으면 어떡하지? 여행으로 빠졌던 아이들 학원 보충으로 바쁘겠구나, 생각해두었던 글을 언제 써볼까, 중고서점에 들러서 읽고싶던 책을 사야하는데, 하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며 마무리하는 밤, 일상으로 돌아온 안도감과 평온함, 이 자리에서, 다시 나는 내일을 시작한다, 는 마음. 아실까요?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 에서 말한 여행의 이유에 저도 동의합니다. 고통을 주는 장소로부터의 탈출, 새로운 곳에서 누르고 싶은 리셋버튼. 저도 늘 제주여행을 그런 마음으로 떠났고, 뽀얀 호텔의 이불을 그런 마음으로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를 더 덧붙여야 할 것 같아요. <여행의 이유>에 덧붙는 <여행자의 태도> 쯤이랄까요. 마음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느끼는 것도 다릅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저에게는 언제라도 뒤돌아보면 다시 닿을만큼의 리에 깊은 늪과 검은 그늘이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그 기분에 지지 않으려고 앞으로 한발짝씩 걸을 뿐이에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면, 마음이 조금은 달라지기도 하더라구요. 누군가 도와줄 수 있지만 대신해줄 수는 없는 일이에요. 저는 앞으로도 제 마음을 돌보는 일에 늘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위해 더 많은 사소한 행복들이 필요하겠지만 많다고해서 크고 화려한 건 아니더라구요. 결국 제주에서 제가 채워온 것들이 그걸 느끼게 해주었어요. 흔하고도 사사로우며 소소한, 새로운 것들을 채워왔으니, 이제 또 한발짝 앞으로 걸어볼게요.

이번 제주여행 사진 몇 장 올리고 갑니다.


그럼 이만, 잘 돌아오기위해 떠났던 제주에서 엊그제 돌아온 여행자 garden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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