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란 그 존재자체로 이미 모순을 잉태하고 있다.
깊숙이 봉인되길 바라는 동시에 언제라도 분출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잘 익은 여드름 같은 게 바로 비밀이다.
복직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옆자리 언니가 어리숙한 나에게 여러 차례 다른 직원의 험담을 해왔다.
처음에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왜? 싶었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뒷담화하는 게 그 언니의 친해지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하하 힘드셨겠어요, 아 정말요? 정도의 추임새에도 그 험담은 숨구멍을 만난 화마(火魔)처럼 잘도 타올랐다.
아무도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조금은 재밌다는 생각, 솔직히 해봤다.
내가 그걸 알게 될 그즈음 그 언니가 알게 된 사실은, 그 욕하던 직원과 나는 사실 친하다면 친하고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었다는 거다.
업무에 발목 잽히고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대면하기 힘들었을 뿐 실은 메신저가 있어 시시콜콜 더 많은 얘길 나누던 그 욕받이와 나는 동기사이였다.
별스러운 얘기도 아니었을뿐더러, 그 언니만의 스타일이 그거라면 존중해주자 싶어서는 개뿔,
업무에서는 늘 굽히고 숙이는 자세여야만 했던 나는 동기의 욕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 언니와 많이 친해졌다.
그리고 일도 많이 배웠다.
언니가 나랑 친하려들 이유란 건 나이밖에 없었지만 그땐 언니에게도 꽤나 간절한 이유였겠다 싶은 게 우리만 초등학생 자녀가 있었고 늦은 나이에 입사해서 굴러온 돌 혹은 모난돌, 같은게 또 우리였다. 그래서
아무도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우리는 윈윈의 관계라는 생각, 솔직히 해봤다.
그런데 그 뒤로 언니를 보니까 나한테 말을 붙일 때마다 살짝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내가 자신의 험담 내용을 당사자에게 이야기했는지 안 했는지를 떠보고 싶긴 한데
그다지 뻔뻔하지도, 그렇다고 능구렁이도, 사회생활 프로 9단도 되지 못한 어설프게 착한 그 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거였지 싶다.
한편, 뻔뻔하지도 능구렁이도, 그렇다고 사회생활 프로 9단은커녕 아마 1단도 되지 못한 건 그 언니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언니의 그런 반쯤 불편하고 반의 반쯤 머쓱하고 또 반의 반의 반쯤은 민망한 그런 태도에 대해 유도리 있게 애둘러 말하지 못했고,
나는 나답게 눈치 조또없이 혹시 그 뒷담화들때문이냐, 그 사람한테 그런 얘기는 전달하지 않으마, 나에겐 그럴 마음이 없어. 하고 직접적으로 얘기해줬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으니까. 정말 그게 이유였다. 그래야만 하는건 아니지만, 그럴 수 있었으니까.
그 때 배운 게 바로 그거다. 그럴 수 있으니까. 의 위력.
아무것도 하지않는데, 무언갈 하는 것보다 더 힘이 셀 수 있는 위력말이다.
비밀은 인간관계를 둘러싼 권력구도에서 갑의 위치를 선점하는 데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도구가 된다.
(물론 나같은 변방의 말단 공노비한테 그런 갑질의 권위가 있을 리는 없다. 그저 그런 향내쯤은 그 일을 통해 맡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오해하시지 말길.)
나도 그랬고, 그 언니도 그랬고 비밀은 가까워지고 친구가 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와 내가 같은 범죄에 가담했거나 같은 불법을 향유하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은 일단은 을이 된다.
그 얘길 들은 사람이 얘기한 사람에게 새로운 비밀을 털어놓기 전까진 일단 그렇다.
그리고 비로소 터진 여드름처럼, 누군가에게 일단 얘기해버린 순간 이미 비밀이 아닌 게 되어버리며 그 사람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일이 되기 쉽다.
인간이란 간사한 존재라서 특히 직장에서는 그걸 휘두르고 싶어지는 순간이 분명 온다.
나에 대한 처분을 내가 결정해야지, 남의 손에 결정권을 쥐어주는 실수는 하지말자. 그게 큰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비밀은 봉인되어 있을때만이 비밀인 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