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rden May 26. 2024

마다할 이유가 없는 영원한 클래식

<새의선물>의 선물

고전은 불온하다. 꼭 읽어봐야할 고전으로 꼽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는 폭력, 질투, 탐욕, 배신 과 같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악의들, 다룰 수 있는 막장코드가 ‘전부’ 라고 말해도 좋을만큼 들어있다. 현재 여러 콘텐츠에 적용되는 연령제한의 기준 들이댄다면 청소년들은 절대 읽어선 안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책을 명작으로 꼽고 입시논술에서도 다룰만큼 공식적으로도 추앙한다. 그 이유를 많은 이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찾는다. 과학기술과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지만 그 가운데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과는 달랐을 그 시절에 극단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통속적인 상황을 겪으며 주인공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살펴보며 인간의 욕심과 저열한 욕구에 대해 파헤치고 처절하게 고민하는 것이 고전의 가치이자 역할이랄 수 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트렌디한 것만큼  촌스러워지는 소설도 없다. 세월의 흐름을 대놓고 실감케하는 이런 소설들은 어떠한 시기에 베스트셀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스테디셀러는 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시절의 세태만을 유독 앞세웠거나, 주인공의 고뇌나 메시지보다는 사건만을 앞세워 밸런스가 깨진 소설, 내용은 뒷전인 채 형식의 신선함만을 들이민 책들이 아마 그런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숱하게 사라져간 막장드라마들이 막장이라는 오명만 쓴 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을지라도 다시는 회자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떠오르는 소설도 몇몇이 있긴한데, 부정적이유로 언급하고싶지 않아서 생략함)


그렇다면 고전이란, 막장으로 흐르는 플롯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식으로 울고 웃는지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고, 결코 시끄럽고 불안정한 사회나 배경이 주인공들을 압도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서 복녀가 매춘을 선택하고 타락해가는 배경에는 먹고사는게 지상최대의 과제이던 1920년대 한국사회가 있었다. 복녀의 죄의식없는 선택에 사회적 배경은 영향을 미친 정도로만 묘사되어야 독자가 이야기를 읽고 판단을 하고 평가를 내릴 기회를 갖게된다. 사회의 여러 면모와 명암을 짚어주어야 하고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회가 처한 현실위에 발을 디딘채 고뇌하고 번민해야 하지만 결코 대놓고 사회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묘사가 전면에 등장해선안된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여기 또 하나의 고전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아도 고전이 가져야할 미덕에 부족함이 없을 내 단하나의 책은 바로 은희경 작가의 데뷔작 <새의 선물> 이다. 이 책은 열 세살 여자아이가 바라본 1960년대의 한국사회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그 책 내용이 뭔데? 라고 묻는다면, 나는 똑같이 열 세살의 여자아이가 바라본 1960년대의 한국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야,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책이다. 60년대 우리나라에 흔했던, 우물이 중심이 된 두 채의 살림집과 가게에서 이어지는 일상에 관한 기록인 이 책을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위에 다 설명했다.  


할머니, 이모와 함께 사는 열세살 소녀 진희는 부모님의 부재탓이었을지, 열세살에 더이상 성장할 필요없이 성숙한 아이었고 세상을 향한 집요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종은 당돌하고 가끔은 상처받은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한다. 그 시선이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였던 나를 부끄럽고 한심하게 만들었고 나는 얼마나 세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를 반추하게 만들었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죄의식이나 공포 같은 강력한 것보다 그리움이나 사랑 따위의 보드라운 것을 이겨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의 감정에 대해 진의를 알고싶어하는 것 자체가 헛된 미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면, 소설이 전쟁 전후 생존이나 존폐의 위기였던 대한민국에서 벗어나 좀 더 개인의 내면, 사랑과 감정 등의 부분을 세심하게 어루만져주는 걸 느꼈다. 고전이란 왜 늘 전쟁과 죽음, 생사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면, 그 이후의 시절이 배경이 된 작품들도 그 시대를 관통하는 또다른 고민과 키워드를 다루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삶과 죽음, 그 자체만 유일무이한 인간의 고민과 번뇌는 아닐 것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지상최대의 가치였던 시절이 있었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시간도 계속해서 흐르는 법이므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가치와 키워드가 또 생겨나는 것이다. 진희는 또다른 격동의 시기가 시작될 전쟁후의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세심하고 침착하게 포착해내고 어루만져준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가 나와 이모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마지막으로 선택받는 사람이 이모일 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면 그 진실 안에서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런 순간이 옸을 때 할머니가 이모 아닌 나를 선택해주느 ㄴ것이 아니라 부디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뿐이다. 최종적으로 그 선택을 하는 주체는 할머니이지만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는 일은 할머니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할머니로서느 ㄴ평생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러나 삶이 할머니를 조롱하기 시작하면 그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회는 필연적으로, 한편 우연히 주어진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춟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 사랑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분석이다. 진희는 유난히 사랑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그건 때로는 남녀간의 사랑이고 또 때로는 가족간의 사랑이나 인류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이야기의 역사라는 게 있는거라면 그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이며, 앞으로도 가장 빈번히 이야기할 주제인 사랑, 이 책에서는 그저 쉽고 1차원적인 남녀간의 물리적 육체적 끌림만을 말하지 않는다. 고차원적이고(미운정-고운정 부분) 다면적인(손녀-할머니 VS 딸-엄마) 여러가지 사랑의 모습들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다. 사람간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소설은 결코 차갑고 냉철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고민이 있는 사람과 책만, 깊이있는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믿기에 <새의선물> 은 사람을, 사랑을, 말하는 소설이다.




-90년대지만 지금도 세상은 나의 유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고 있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서 위선과 악의를 배워가며 이형렬들은 군대에서 애인을 구하고 뉴스타일양장점의 계는 깨졌다가 다시 시작되며 신분상승을 위한 미스 리의 교태가 반복되는 한편에서 광진테라 아줌마는 둘째아이를 가짐으로써 뒤웅박 팔자 속에 구덩이를 판다. 정여사의 남편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으며 유지공장의 불 같은 뜻밖의 재난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그 사고는 이내 잊혀진 뒤 반복되며 사고가 잊혀진 뒤까지도 그때 대동병원이 번 돈처럼 돈들은 증식을 계속한다.


소설 마지막 부분의 일부에 내가 이야기하려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60년대에 사춘기를 보내고 90년대에 성인이 된 주인공 진희가 하는 말이, 고전이 우리에게 다하는 역할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해도 그곳에 사는 인간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모습들을 포착하고 보여주는 일, 인간에 대한 관심과 고뇌를 담담히 그려내는 일이 훗날까지 고전으로 읽힐 책일 것이다.


진희가 어른으로 살던90년대에서 이 책은 끝난다. 허나 그 후로 30여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또 읽어도 촌스럽지 않은 이 책, 십여번을 넘게 읽어도 또 새로운 나의 영원한 클래식 <새의선물>. 내가 지금 가진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인간에 대한 고민, 타인과 사회를 향한 시각의 팔할은 이 책이 만들어주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말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생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에 관한 것은 말해 뭐할까. 그게 <새의 선물>이 내게 준 진짜 선물이다.   


이전 01화 나를 현실에 붙들어두는 , 이야기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