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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May 17. 2024

나를 현실에 붙들어두는 , 이야기의 힘

<저주토끼> 이야기

한여름밤, 목이 꺾어져 아래로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꾸벅이면서도 안간힘을 쓰며 돌아가던 낡은 선풍기, TV불빛이 어스름히 비추는 한쪽 구석에서 점멸하듯 피어오르던 모기향, 신문지 부채를 연신 부치며 내 머리를 쓸어주던 우리엄마, 부칠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약한 바람을 일으키던 부채와 잔머리를 훑어주던 노곤한 엄마의 손길.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 여름의 풍경이다. 그랬던 밤들에 나는 잠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어른대는 정신을 붙잡고 안자려고 애를 쓴다. <젊어지는 샘물> 이나 <호랑이와 곶감> 같이 끝없던 엄마의 옛날이야기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동앗줄이 끊어져 호랑이가 떨어졌다든가, 곶감에 울음을 뚝 그치던 아이가 나오는 부분도 좋아했지만 소와 돼지의 간을 내먹던 <여우누이>를 무척 좋아했다. 무서우면서도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묘한 짜릿함때문이었지 싶다. 그런 숱한 여름밤들을 보내고 곶감과 고구마의 계절을 지나 TV시리즈 전설의 고향에 비로소 자리를 내어주기 전까지 엄마의 얘기는 계속되었었더랬다.


뒤늦게 어른이 된 후, <여우누이>가 거의 유일무이하게 어떤 교훈을 주지 않는 단순히 흥미만을 위한 전래동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 여우누이를 들으며 늘 "무서워서 듣기 싫은데 왜이렇게 재밌지?" 라고 얘길했었다. 그땐 무서운 이야기가 지속되길 바라는 묘한 심리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여우누이가 소와 가축들의 간을 내먹은 것도 모자라 오빠들까지 다 잡아먹은 이야기속 세계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웠지만, 이야기에서 빠져나왔을 때 끊임없이 일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신문지 부채의 바람과 엄마의 숨결, 소리없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기향의 재같이 내가 속한 세계가 안전하고 고요한 것이 참말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여우누이 말고도 숱하게 많았던 다른 전래동화들이 가르쳐주었던 권선징악이나 결자해지같은 교훈들이 실은 세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인지상정’에 관한 것들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소설집 <저주토끼>에 수록된 여러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전래동화가 떠올랐다. 졸음앞을 서성이던 내의식이 저 너머로 가지 못하도록 기어이 나를 붙잡아두던 흥미진진한 서사, 그 자체의 힘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용상 공통분모가 없어보이는 각각의 단편은 불안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들 이라는 공통점으로 꿸 수 있다. 오롯이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친구의 복수를 위해 토끼 스탠드에 저주를 건 할아버지, 내가 변기안에 싸고 내려버린 배설물들이 생명체가 되어 내게 알은체를 하다가 종국에는 나와 몸피까지 바꾸게 되는 기이하고 섬뜩한 상황, 정체모를 손가락에 의지해 어둠속을 헤매는 여자, 저주에 걸린 왕자를 구하러 길을 떠나는 공주,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때로는 조근조근 이야기만의 힘으로, 때로는 권선징악적 교훈으로 나를 이끌던 주인공들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 이나 '즐거운 나의집' 처럼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또는 '저주토끼' 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처럼 비현실적인데도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고 나를 장악했고 나는 그 앞에서 꼼짝없이 빨려드는 순수한 독자가 될 수 있었다.


'저주토끼' 와 '머리' 그리고 '흉터' 와 같은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판타지에 가깝다면 '즐거운 나의집' 은 일상을 파고드는 평범한 공포라는 점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현실적이어서' 가장 무서웠던 이야기 말이다. 부동산, 대출 등등 내가 하는 고민과 비슷한 상황이 소설속 배경이라는 점에서 더 몰입이 되었고, 오롯이 책에만 집중한 채 순식간에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책에서 눈을 떼 현실로 돌아왓을 때 일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음에 감사했다. 두발로 굳건히 내가 선 세계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평화로운 곳임을 실감했다 옆에있는 가족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고 심심하다고 느낄 수 있는 하루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했다.


불혹, 不惑.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만큼, 새로운 자극에도 쉬이 둔해지고 궁금한 것도 알고픈 것도 없는 그런 나이. 어린 시절처럼 이야기를 갈구하지도 갈구할 수도 없는 불혹의 나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자주 권태롭거나 자주 위태롭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권태롭고, 별 일이 아닌데도 위태롭다. 그런 어리석은 불혹에게 이런 소설은 얼마나 값진가. 권태로움을 무사함으로 읽을 수 있고 위태로움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용기를 책속의 주인들에게서 얻는다. 반듯하게 놓인 내앞의 일상과 생에 단단하고 든든히 신발끈을 묶고 담담하게 임할 수 있게 하 힘을 이야기 속에서 얻는다.


그래서 <저주토끼>는 언제라도 열어볼 수 있는 상자처럼 내 가슴 안쪽 어딘가에 저장해두었다. 굳이 무언갈 배우려들지 않아도, 해석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은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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