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rden Jul 04. 2024

관계의 생로병사

너와 내가 지나온 시간들, <여름의 빌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얼마나 나아졌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도 에게 ‘과거’ 라는 축복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미화되고, 유한해서 아름다웠던, 그 선물같은 시간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수린 작가의 소설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 때는 몰랐기 때문에 더욱 반짝이며 빛을 뿜는 ‘그 시절’ 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는 인생을 통틀어 꼽을 수 있는 몇몇의 친구들이 있지만, 그 중에 내가 잃은 친구가 있다. 잃었다는건 물론 현재는 없다는 얘기다. 친구를 잃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연인 사이에만 타이밍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관계를 돌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그 친구와 나의 시계는 달랐다. 우리의 타이밍은 어긋났다. 친구 아버지의 사업이 잘못되어서 학교로 빚쟁이들과 채권자들이 찾아온 게 대학교 2학년의 일이었고,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그렇게 큰 일을 겪은 친구를 어떻게 위로하는 줄 몰랐었다고 하면 그 친구에게는 변명이겠지만 나는 정말로 몰랐었다. 그 후로 내가 어른이 되고, 나 역시 번번이 시험이 낙방했고, 친구는 힘들게 들어간 외국계 회사에서 적응하느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에게는 억울하게 친구와 멀어진 미련의 불씨가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 친구는 그걸로 끝이었나 보았다. 여러차례 연락을 하고, 편지를 쓰고, 내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전했지만 완전연소해버린 친구의 마음은, 거기까지였다. 사랑했던 친구를 잃는다는 건, 어쩌면 그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었다. 나에게는 20대의 청춘이 반드시 그 친구와 함께 떠오르는데, 그 친구가 곁에 없었으므로 나는 그 시절을 쉽사리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 친구의 마음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 을 읽어보니 그건 잃은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일인거였다. 필연이라고 할까. 잃었다고 생각했을 땐 자책했지만,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궤적>은 나에게 위로였다. 책으로부터 면죄부를 얻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처음이라서, 나는 백수린 작가를 그때 ‘알아보았다’. 마치, 흡연자가 흡연자를 알아보듯, 애주가가 애주가를 알아보듯, E인척 사회생활하느라 진이 빠지는 I 가 또다른 I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듯 나는 백수린 작가를 알아보았다. 아마도 나와 밤새 수다를 떨고 어떤 이야기를 언제고 나누어도 말이 통할 사람이라는, 친구였다면 베스트프렌드라도 될 수 있었을거란 느낌을 그녀를 보고 느꼈다. 나는 그녀를 통해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그림도,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여러가지 예술작품들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밤을 기억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습기였다. 세 달 남짓한 여름밤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대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고,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골목들은 가로동의 따뜻한 불빛에 덮여 있었고, 도시의 오래된 건물들은 나에게 영원을 떠올리게 했다. (중략) 새벽이 되면 파리는 희붐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언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나를 낯선 곳,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근사한 세계로 데려갈 무언가를 곧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가슴이 뛰었다.



백수린의 소설모음집 <여름의 빌라>를 펴면,  어김없이 한 번도 가보지 않 초여름의 프랑스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비가 한차례 내려 흙냄새와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낭만적인 파리의 골목에 나도 같이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사랑했던 20대, 그 시절의 나와 내친구로 시계는 빠르게 돌아간다. 그 시절 술에 취해 흔들리던 밤의 거리, 헤픈 웃음과 손짓들로 부풀어 오르던 불빛들, 나는 그렇게 숱한 밤과 술잔들 앞에 그 친구와 함께였다. 떠올려보면 우리가 멀어진 것 역시 소설에서 그린대로 나는 나만의 문제를, 너는 너만의 상황을 견디느라 자연스럽게, 그저, 멀어졌고, 받아들였다. 다시 가까워질 시도를 해볼 수 있었을 둘은 그러지 않는다.


“내가 애초에 그리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파탄이나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져버리는 과정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관계의 생로병사 같은 것”


백수린은 이걸 작가노트에서 ‘관계의 생로병사’라고 표현했다. 나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친구와의 관계를 생로병사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고나니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은 가벼워졌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열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다가올 인연들을 막지않고 떠나간 사람들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달까.  이런 마음은 예전 짧은 생각 매거진에도 잠시 언급한 적이 있어 첨부해본다.


https://brunch.co.kr/@inthegarden/21



한편, 같은 소설집에 실린 단편 <아카시아숲 첫 입맞춤> 속 다미와 유나를 보면 그 시절의 내가 너무 생생하게 떠오른다. 미래에 어떻게 될 지 몰라서 불안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10대의 나, 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묘사라서 뻔하고 시시하다는 평가도 어디선가 보았다. 하지만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게 나였고, 그게 그 시절이었던 것을 어떻게 뻔하지 않게 묘사할 수 있을까.  여기서도 유나와 다미는 관계의 생로병사속 인물들이다. 결이 다르지만 친구가 되었던 둘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기댔다가, 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과정에 대한 얘기를 보고 있자면 나역시 내 인생의 전부였던 10대의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못내 궁금해진다.


다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녀의 옆에 앉아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면 가지런히 빗어 넘겼던 우리의 머리카락이 기분좋게 뒤엉켰고, 잔물결이 일렁이는 수면 위로 새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이 떨어지곤 했다. 새털처럼 가볍게 부유하던 꽃잎들. 연두색 나뭇잎 사이로 너울대던 초여름의 빛.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밀어를 주고받듯 서로 속삭였고, 순백의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흔들릴 때마다 사방은 향기로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달콤한 향에 혼곤히 취해 있다보면 오후는 더없이 느리게 흘렀고 나는 쉽게 무한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우리의 맨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아카시아숲, 첫 입맞춤>에 묘사된 이런 시선들을 보면 나는 사계절과 한달 하루 그 어느 시간대와 그어느 계절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초여름의 오후를 어쩌면 이리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바라보았을까. 은근하고 천천히 눈을 돌려 작은 흔들림과 움직임,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고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쓴 문장을 읽으면 나는 그저 쉽게만 행복을 얻으려 하진 않았는지, 문장이든 말이든 대강 가져다 쓰려고 했던 건 아닌지 반성조차 하게 된다.


사실 내옆을 지나간 수많은 시절과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무수한 줄 알았던 지난 시간들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고, 그것이 잃은 것들이라면 나는 미래의 희망 역시 그다지 기대할 것 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너와 내가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지금의 내가 자라났고, 거기에서 내 내일도 새로 태어나는 것이리라. 결코 잃은 것도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백수린 작가는 나에게 마음이 울적해질때면 울적해서, 기쁠때면 기뻐서, 아무일도 없으면 아무일도 없어서 오르고 싶은 집근처 야트막한 동산과도 같다. 정유정이나, 김초엽 같은 류의 작가들이 넘기 힘든 험준한 산맥같은 느낌이라면, 백수린 작가는 언제고 나에게 곁을 내어주고 조근조근 말을 건네어 주는 친구같다. 얼키고 설켜서 다음장을 읽지 않고는 못배길 탄탄한 서사나,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극적 플롯, 갖은 미사여구로 포장된 현란한 문장이 아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울림을 줄 수 있다. <흑설탕 캔디> 에서 그리는 할머니의 모습만 봐도, 백수린 작가는 나와 같은 시절을 지나왔고, 그 시절의 어른을 겪어본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는데, 그래서 백수린은 내가 알아본, 나와 뇌구조가 같은 사람이다. 언제고 울적해졌을 때 내 마음이 때 꺼내어 맛볼 수 있는 흑설탕 캔디같은.

이전 04화 미움의 여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