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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Aug 07. 2024

도덕과 위선의 잠금해제

스며드는 일상의 스산함 <죽은자로 하여금>

언젠가부터 그런 이야기에 끌리곤 했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 에도 잠깐 언급되는 내용이다.

그동안 나는 할머니가 나와 이모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마지막으로 선택받는 사람이 이모일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면 그 진실 안에서 내가  바를 수 있는 것은 그런 순간이 왔을 때 할머니가 이모 아닌 나를 선택해주는 것이 아니라, 부디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뿐이다. 최종적으로 그 선택을 하는 주체는 할머니이지만 그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는 일은 할머니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나, 은밀한 순간 인간은 얼마나 도덕적이며 이성적일 수 있는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그런 순간이 혹시라도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궁금증을 나는 이야기를 읽고 보며 간접체험하고 달래왔던 것 같다. 예전에 망한 영화 <해무> 는 진짜로 망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숱한 영화중 하나가 될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 이 영화를 기억한다. 심지어 적당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몇 차롄가 보았다. 그건 전성기에 반해 저문 골짜기도 깊었던 한 아이돌 출신의 배우때문도, 쓸데없이 잔인하고 야한 여러 장면들 때문도 아니었다. 인간이 절박하고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의 민낯을 ‘정말 저렇겠다’ 싶게 그리기 때문이다. 나도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되는건가, 에 대한 간접체험이랄까. 또 비교적 최근에는 <부부의세계> 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바람난 남자를 향한 아내의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다른사람들과 달리 나는 궁지에 몰린 이태오를 눈여겨 봤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마침내 드러난 찌질하고 지저분한 본성.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확인한 부부의 마지막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바닥이란 그런걸까, 나의 바닥은 어디일까를 생각하느라 남들과는 다른 이유로 나에게 짙은 여운을 주었던 드라마였다.


그럼, 이런일이 드라마나 영화,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아니다. 이런 일은 사실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몇해 전 화재속에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탈출해 다시 아이를 구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한 엄마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그 엄마는 수백장의 탄원서들과 대법원까지 간 다툼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수는 있을지라도, 법적으로 그 엄마를 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게 선고의 이유였다. 언젠가는 내가 자주가는 한 다음카페가 어떤 사람으로 인해 뒤집어진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요지는 대강 그자가 부자가 아닌데 부자인 척을 하고, 본인이 커미션을 받는 업체의 물건을 직/간접적으로 홍보해서 판매하고 금전적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구경꾼1 쯤의 포지션으로 팔짱을 낀 채 구경중이었는데도 꽤 충격적이라서 현생까지도 피폐해진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실은 그 사건 자체때문이라기보다 평소 점잖고 지적이며, 교양머리 있던 구경꾼2와 3을 비롯 구경꾼 수백들의 난입과 진흙탕 개싸움 퍼레이드 때문이었다. 익명뒤에 숨은 이들은 남의 이야기를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필요한 얘기 필요없는 얘기 더할 얘기 뺄 얘기 곱할 얘기 나눌 얘기 등등 말그대로 ‘아무얘기’ 나 필터링없이 그야말로 ‘싸지르고’ 있었다.


이 책은 그 얘기다. 적당히 체면을 차리고 어중간한 도덕성을 가진 한 남자가 시험대에 올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 선택에 따라 얼마나 일상을 좀먹어가며 얼마나 최악으로 치닫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편혜영작가는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잘 포착한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상황, 겪을 수 있는 경험에 드리우는 그늘과 은근한 공포를 그린다. 작가의 전작 <사육장쪽으로> 나 <아오이가든> 같은 단편부터 <재와 빨강> , <소년이로> , <홀> 에 이르는 장편들까지 편혜영 작가가 쓴 다양한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단연 ‘일상의 불안’ 이다.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건에 휘말리는 주인공조금씩 진척되며 변화해가는 이야기와 일상의 변주를 미동없이 차분하게 끌고가는 힘이 있고 문장을 참 잘쓰기도 한다.   


<죽은자로 하여금> 역시 라면 어땠을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끌렸다. 40여년 이상을 살다보니 도덕적 인간을 믿지 않게 되었다. 차라리 위선적 인간을 믿는다는 쪽이 맞다.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혹은 앞뒤 따지고 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본성을 드러낸다. 그게 진짜 자기 모습이다. 선임(이석)의 비리를 알게 된 후임(무주), 이석을 고발하지 않으면 내가 내몰릴 수도 있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과연 무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가 이 소설의 큰 얼개다. 익명이 보장된 내부고발로 이석을 몰아냈다고 믿었지만 되레 본인이 공격받는 처지에 몰린 무주는 매일의 일상이 파괴되고, 본인의 싸구려 도덕심이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의 전작이 그러했듯, <죽은자로 하여금> 역시 그 어떤 시원한 결말도 내려주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주인공은 우울을 견디고 일상을 겨우겨우 떠받치고, 오늘을 보낸다.


40년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어찌됐든 40여년 이상을 살다보니 대단한 불행이나 불운이 찾아오는 것도 확률상 쉽지는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인생에 대단한 요행이나 행운이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그래서 또한 확률상 나 혼자일때보다 결혼을 했을 때, 결혼을 했을 때보단 출산을 했을 때 자잘한 사건과 사고, 고민과 골칫거리는 잔잔하게도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런 자잘한 문제들을 전담하기 위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고 작은 문제들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그런 문제들을 처리하면서 내가 느낀 것이 있다면, 내 밑바닥과 내가 가진 패를 쉽사리 상대에게 보여주는 건 필패의 법칙이라는 거였다. 내가 잃을 것이 많거나, 얻을 것이 없는 경우, 몸을 사리고 쥔 패를 그대로 보전하는 것이 다음 스텝을 기약하는 방법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부당한 대우를 절대 참지 않았고, 행동 뒤에 계산 따라왔기에 일단 저질러놓고 뒷수습에 당초 발생했던 문제보다 더 큰 에너지를 쏟기도 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어디까지 내가 추해질지 겪어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리라. 법은 최소한의 도덕으로 삼고 서로 예의를 차리고 의리를 따지고 상도덕을 정하며 규율을 따르는 이유역시 우리의 마지노선들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어서일테다. 서로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은 서로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는 거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어느정도는 위선적이며, 그건 나쁜게 아니다.


나의 알량하고도 얕은 우물과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키고싶지 않다. 어중간한 정의감과 도덕성, 적절히 포장된 위선을 누구 앞에서도 잠금해제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와, 내가족을, 또 나의 평범한 하루를 지켜나가고 싶다. 내가 애써 지켜내려하는 것이 이토록 보잘것 없는 오늘일지라도, 편혜영의 소설을 읽은 다음에라면, 그럼에도, 나의 평범한 오늘은 지켜야겠다.


ps) 적어도 내주변에서는 편혜영작가의 소설은 호불호가 굉장히 명확했다. 불호를 택한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가장 많은 의견이 ’책마다 그게 그거라서‘ 였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편혜영의 소설중 한 권만 추천한다면?” 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편은 <사육장쪽으로> 장편은 <홀> 을 꼽겠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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