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를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가 궁금할 때가 았다.
나는 그저 대충 표준대로 살고있다고 믿는지라 궁금하진 않았는데 그게 뭐랄까 내나이가 얼마로 보이든 딸 둘을 데리고 나가면 내 나이는 이미 지정되는 것이라서 궁금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맞겠다. 여기부터 벌써 문제다. 내 나이란 이미 주민등록번호로 확정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진리인 것을 각자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내 나이가 마흔 셋에 아이가 둘이고 첫째는 초등학교 6학년이라니 소스라치게 놀란 한 직원이 회사에 있었다. 정말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이 '소스라차게' 놀란 모양새길래 나는 정말 그친구의 말대로 내가 많이 봐야 30대 중반으로 보이나, 잠깐 생각했었다. 친구에게 그 친구가 놀라던 그 모습을 중점적으로 어필하면서 내 나이 얘길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그것이 바로 사회생활이라고 했다. 그 생활이 능숙하게 학습되어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만큼 자연스러웠던 거라고.
나를 30대 중반으로 보더라고 했더니 친구는 그럼 진짜 30대 중반인 애들은 30대 초반으로 보인다는거고 30대 초반인 애들은 20대로 보인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대답해줬다.
친구야, 그럼 20대인 애들은 고등학생으로 보이고 고등학생들은 중학생으로 보인다는건데 그러면 뭐 초등학생들은 신생아로 보인다는거냐 라고. 내 말이 억지라는 거 나도 알고 친구말이 맞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사실 한낱 시덥지않은 말장난이었지만 딱히 관심없던 나이에 대해 생각하자니 다시금 나이란 얼마나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개념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실제 나이가 마흔셋인 내가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산다면 실재하는 내 몸은 몇 살인가. 출산을 한 것과 안한 것 사이,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겨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간극, 온실속의 화초로 커온 사람과 세상의 온갖 풍파를 이겨낸 사람의 차이. 나이는 이런 실제와 실재 의 틈을 아무것도 메우지 못한다.
인간의 인식은 얼마나 희미하고 나약하기에 태어나고 살아온, 정확하고도 확정적인 시간마저 이리도 왜곡하게 만드는가. 나이마저도 불확정적일 때 우리는 무엇을 믿고 앞으로 나야가야하는가.
그건 아마도, 숫자에 불과할 나이에 맞서 표준이라는 틀을 너머 나만의 삶을 내가 만들어나가는, 나에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30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과인줄로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미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첫째를 낳고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벤처로 이직한 일은 모두 우리 부부에게 30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후로 40대가 된 우리는 많은 부분을 바꿨고, 여전히 미래를 꿈꾼다. 마흔셋의 나를 삼십대 중반으로 보며 부러워 하든, 오십대로 보며 안쓰러워 하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나로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 다. 실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냥 숫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