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단어 26-365
두 몫이나 답답했다. 매우 답답했다.
1.
계절이 뒤엉켰다.
상쾌한 가을날을 기다리지만,
올해는 어쩐지 흐릿하게 지나갈 것만 같아서
두목답답하다.
1930년대 젊은 소설가 김유정은 한 일간지에
단편소설 「만무방」을 실은 적이 있다.
소작농 응오의 절망적인 삶을
그의 형인 파산농 응칠의 관점에서 서술한 사실주의 소설이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답답한 아우의 살림을 보니 역 답답하던
제 살림이 연상되고 가슴이 두목답답하다.”
2.
‘두목답답하다’
그런데 최근 출판사들이
이 말을 아예 ‘두루 답답하다’로 바꿔버렸다.
사전에서도 사라졌고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인 데다가
뜻도 모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정이 이 말을 쓸 때 그 뜻은 분명했다.
‘두 몫이나 답답했다. 매우 답답했다.’
말이란 연상되는 의미가 재밌을 때가 있는데,
이 말도 가만히 보면 ‘답답함의 두목’
즉 ‘가장 답답하다’라는 말을 ‘두목’ 또는
‘두 몫’에 빗대어 만들어 쓴 듯하다.
어찌 보면 ‘두목이 답답하다’라는 뜻도 가능할 것 같다.
3.
사실, 저 소설 제목 「만무방」이라는 뜻도
‘염치가 없고 막돼먹은 사람’이었다.
소설 주인공 응칠이를 돌려 말한 서술이었다.
하긴 이런 인물이 생기게 된 이유가 있다.
만무방을 이해하려면 소설이 1930년대 농촌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만무방은 응칠이지만
정작 문제는
건실하던 동생 소작농 응오 역시 점차 만무방이 되어간다.
그는 자기가 아무리 수고해도 지주들을 배불릴 뿐 결국, 남는 것은 등줄기 땀방울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여 그 벼수확을 포기하고 내버려 둔다. 아예 벼 도적이 되기로 한다. 이 과정은 일제 강점기 상황만이 절대적 문제가 아니라 고리와 치부에 혈안이 된 지주들의 착취가 원인이었다는 것을 비판하기에 슬프기까지 하다. 작가의 마음속에 응오라는 인물은 시대 정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 인물의 한탄 속에서 정의와 공의가 개인의 범주를 넘어 정치의 영역이라는 것을 나는 지나칠 수 없다.
4.
‘두목답답하다’
하긴
‘두루 답답하다.’, ‘매우 답답하다’라고 해도 뜻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옛말이 더 감칠맛 난다.
그저 바라기는 살아가는 동안 괜한 일로
통치의 문제로 ‘두목 답답한’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아무리 답답해도
소설 속에서 자기 퇴속적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만무방 응칠이처럼
‘남의 무밭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무를 마구 뽑아먹으면서 그 단맛 가득한 무가
신의 선물이로구나’라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가을 상쾌함이 두목답답하지 않게 속히
내 삶으로 들어오길 기도하는
비내리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