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크, 순간 판단력 — 진기명기(盡祈銘記)

Contra: “위기의 순간에 판단을 유보하고 기도해 보자”라는 권면

by 푸른킴

젊은 예수가 꿈꾼 대조사회 (마태복음 5~7장)

젊은 예수는 막무가내로 개혁만 외친 인물이 아니었다. 네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가 증언하듯 그는 하늘의 뜻 앞에 겸손히 순종하면서도 군중을 이끈 지도자였다. 진리를 알았기에 자유로웠고, 자유로우면서도 단아한 태도로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산 위에 올라 입을 열었을 때도 그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단호했다. 귀 기울인 이들은 그 말씀이 갈릴리 호수처럼 깊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가 특별히 목소리를 높인 순간은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전할 때였다.


기도는 당시 지도자들의 자부심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로 야훼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으며 통치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기도가 자기 유익과 체면에 치우친 편향된 행위라 고발했다. 기도는 개인적 안위를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삶을 세우는 도구여야 했다.


예수, 기도로 대조 사회를 열다

예수의 기도는 단순한 개인의 경건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사회의 뿌리가 썩어가고 있음을 드러내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독일 가톨릭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이를 ‘대조사회(對照社會)’라 불렀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상과 대조되는 공동체였으며, 예수의 기도는 이 대조사회를 견인하는 통치의 수단이었다. 산 위에서 선포된 기도는 단순한 소망의 언어가 아니라, 왜곡된 체제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여는 길이었다.


예수의 기도는 개인적 탄원을 넘어 사회적 기도였다. 그것은 절망적 현실을 자신의 삶에 끌어안아 중보 하는 관계적 기도였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좁은 문’이었다.




좁은 문과 기도문

기도는 경계를 넘어서는 문이다. 옛 세계를 떠나 새 세계로 향하는 통로이며, 희망의 길이다. 나니아의 옷장 문, 스즈메의 물 정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문처럼 기도는 경계를 무력화하고 다른 차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예수의 기도가 단순한 말로 끝나지 않고 ‘기도문’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기억을 보존한다. 기록된 기도는 최초의 삶의 자리를 담아내며, 후대가 그 현장을 다시 살아내도록 돕는다.


기도문은 반복과 암송을 통해 몸에 새겨지고, 글로 남겨졌기에 해석과 변주를 허락한다. 같은 기도문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린다. 기도의 말이 겨처럼 흩어질 수 있다면, 기도문은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열매 맺는다.


기도문의 효과와 순간 판단력

기도의 시작은 신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그렇다면 끝은 언제일까? 모든 기도의 말은 ‘기도문’으로 남겨질 때 끝난다. 기도가 말로 흩어질 때는 아직 미완이다. 그러나 그것이 글로 기록되고, 후대에 낭송될 때, 기도는 하나의 형식을 갖춘다. 기도문의 탄생은 곧 기도의 마침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 효과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휘발되는 말을 붙잡은 결실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말은 순간의 울림으로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글은 기억을 강화하고 반복을 가능케 한다. 기록된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의 흔적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무한히 재생산되는 유산이다. 예수의 기도가 오늘까지 이어지는 힘은 바로 이 글의 힘에 있다. 기도문은 최초 기도의 자리를 보존하면서, 그 현장을 오늘의 삶 속으로 다시 불러온다.
둘째, 다양한 해석과 의의 변주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우선 반복과 암송 속에서 몸에 새겨진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암송이 아니다. 글로 남겨졌기에 기도문은 해석을 허락한다. 독자는 같은 기도문을 읽으면서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린다. 그러므로 기도문은 고정된 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꽃을 피우는 씨앗이다. 이처럼 기도문의 두 번째 효과는 ‘변주 가능성’이다. 해석의 여지를 지니기에, 기도문은 살아 있는 언어로 계속 작동한다.
셋째, 지체 없는 행동 촉발이다. 이 기도문은 체득된 습관을 넘어 순간 판단력으로 발휘된다. 블링크(blink)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이다. 기도문은 단지 마음을 위로하는 문서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즉각적 결단을 가능케 하는 내면적 장치다. 인간의 뇌는 반복된 언어와 습관을 통해 무의식적 반응을 형성한다. 평소의 기도가 글로 남아 암송될 때, 그것은 단순한 기억을 넘어 영적 반사 신경이 된다. 따라서 위기의 순간, 긴 기도를 드릴 여유가 없을 때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이미 내 안에 새겨진 기도문이다. 준비된 기도문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천적 판단력으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기도문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으로도 작동한다. 기도문은 개인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도할 수 없는 절벽에 닿았을 때, 타인의 기도문은 그의 버팀목이 된다. 기록된 기도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넘어 공동의 목소리가 된다. 이 점에서 기도문은 공동체적 순간 판단력을 형성한다. 한 개인의 습관이 공동체 전체의 위기 대응 능력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요컨대 위기의 순간, 기도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판단력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기도의 무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 기도가 이미 행동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랭던 길키의 『산둥수용소』가 보여주듯, 절체절명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길게 앉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새겨진 기도의 힘으로 즉각 결단하고 움직이는 용기다. 평소의 기도문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나의 기도문—진기명기(盡祈銘祈)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은 순간 판단력을 길러주는 훈련이다. 위기의 순간 판단을 멈추고 ‘기도’라는 명목으로 물러서는 것은 신앙적 모순이다. 기도는 도피가 아니라 준비이며,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문은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흩어진 기도가 글로 남을 때, 그것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유산이 된다. 반복과 암송 속에 각인되어 위기의 순간 결단을 이끄는 영적 근육, 영혼의 반사 신경이 된다.


또한, 기도문은 개인의 탄원을 넘어 타인의 목소리를 품는다. 누군가의 기도문을 읽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내 삶에 새긴다. 기도문은 공동의 탄원이 되고, 고통을 나누는 사회적 저항이 된다. 기도문은 동시에 신의 통치를 증언하는 언어다. 아무 일 없을 때 드린 작은 기도가 글로 남을 때, 그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흔적이 된다. 그 흔적은 후대에 이어져 또 다른 판단력과 행동으로 열매 맺는다.


따라서 평소의 기도를 글로 남기고 암송하는 일은 단순한 영성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준비다. 작은 기도문 한 줄이 위기의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등불이 된다.

결국, 기도문은 나를 넘어 타인을 품는 도구다. 나의 탄원 속에 너의 아픔이 스며 있고, 너의 기도 속에 나의 희망이 담긴다. 이 교차 속에서 기도문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항해 일지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문은 진기명기(盡祈銘祈), 마음을 다해 새기고 기억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진기명기(珍技名技), 후세에 남길 귀한 삶의 기술이다. 우리의 기도문은 불안한 세계 속에서도 지체 없이 행동할 용기를 주며, 하늘의 질서를 이 땅에 새겨 넣는 지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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