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그 “안전한 지대”를 상상하다

— 고정희,『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by 푸른킴

신학의 발현으로서 시학

오늘날 불확정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디에서 안전한 지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시인 고정희(1948–1991). 신학을 이수하고, 해방문학에 근거한 시를 썼으며, 한국여성문화운동에 참여하여 활발히 활동하다 40대 끝 무렵 지리산 등반 중 악천후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시인이었지만, 신학이 삶의 온전한 토대였습니다. 문학은 그의 신학을 발현하는 방법론이었고, 그 방법론은 곧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작은 단어 하나로도 어두운 세계를 균열 낼 수 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문학이 던진 경고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세계는 인간을 건조하게 만드는 데만 몰두했고, 물질의 발전과는 반대로 인간 본연의 정의로움은 뒷걸음질 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어두운 시대 어디서든 자기 언어를 꿋꿋하게 지켜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불현듯 그의 시가 다시 살아난 것도 그 증거 중 하나였습니다. 식사 후 SNS에 누군가 고정희 시인의 한 토막을 공유했습니다. 히브리 시편 12편 5절을 읽다 국어 시간에 접했던 고정희의 시가 떠올랐다는 설명과 함께였습니다. 뜻밖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가 전한 구절은 〈눈물샘에 대한 몇 가지 고백〉의 후반부였습니다.


“<중략>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여기 반복되는 ‘사랑하지 않으면’은 의도된 선언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감춰진 눈물샘을 알 수 없다는 고백이지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시인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한 ‘사랑하는 삶’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고통에 응답하는 시

잠시 뒤, 다른 누군가가 시인 박노해의 시를 공유했습니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마지막 연, 2010)


아침의 시편이 저녁 두 시인의 시로 새롭게 해석된 셈입니다. 두 시인은 공통으로 ‘눌림(가슴이 압박당하는)’과 ‘탄식(숨 막히는 상황)’의 정서를 붙잡습니다. 누구도 하루를 여닫으며 이런 감정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습니다. 고정희는 현실의 고통에 공감하는 신학적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켰고, 박노해는 문학이 현실참여·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과 두 시인의 시에는 고대와 현대, 신학과 문학을 가로지르는 공명, 곧 눌림과 탄식의 정조가 흐릅니다. 이제 이 눌림과 탄식의 정조가 시편 12편의 핵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번역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안전한 지대와 갈망하는 구원

널리 알려진 한글 번역은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개역개정)


여기서 사람들의 눈길은 ‘안전한 지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전은 다양한 번역을 허용합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옮깁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 (새번역)


이 번역에서 주목할 표현은 ‘갈망하는 구원’입니다. ‘안전한 지대’와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두 표현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시편 시인은 가슴 막히는 눌림과 탄식 속에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곧 안전한 지대로 은유합니다. 결국 ‘안전한 지대’와 ‘갈망하는 구원’은 모두 억눌린 현실 속 보호받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고정희의 시 역시 이 안전한 지대를, 곧 구원의 공간을 시로 상상하여 구현했습니다. 눌림과 탄식의 현실 속에서 안전한 지대가 은유된 것처럼, 고정희는 그것을 ‘여백’으로 문학화했습니다.


여백의 탄생

고정희의 유고시집 표제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일부입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이 시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가족의 무덤, 죽음, 부재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죽음 너머 탄생으로 향합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여백’입니다. 여백은 빈 곳, 간격, 벌어짐, 이완이며, 히브리 사상에서는 안식과 이어집니다.


안식은 모든 것이 잠잠해지는 고요 속의 생동입니다. 창조 사건 후 신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완전함의 선언입니다. 그 완전은 가시적으로 다 갖춘 상태와 유연함을 보장하는 완충의 자리까지 포함합니다.

생존의 여백으로서 안식의 시공간

사회학자 김현경은 “사람에게 장소를 확보해 주는 것은 환대받는 증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올바름”이라 말합니다. 인간에게 구원은 곧 공간의 문제이며, 환대받는 안전한 지대와 직결됩니다. 시편 시인이 고발하는 시대처럼 악이 득세하는 때에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합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경제·법이 지배하는 건조한 세계의 취약점을 ‘공감’에서 짚습니다. 그는 문학을 행동 도구로 삼아, 소설과 시에 담긴 상상 현실이 타자를 인정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이바지하는 가장 큰 공헌은, 우리가 구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힘에 있다.”


따라서 고정희가 무덤 앞에서 상상해 낸 여백은 죽음을 탄생으로 견인하는 강력(强力)이 됩니다. 문학으로 생성된 이 상상은 지금 이 세계에서 우리가 견뎌야 할 신학의 체현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로 신의 시선을 뒤따랐고, 신학은 문학을 통해 신의 공감 세계를 재서술하며 현실에서 체현됩니다.


신학과 문학이 창출하는 삶의 여백

21세기,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납니다. 예기치 못한 죽음, 억울한 판결, 가려진 정의, 관계의 단절로 위태로운 자리에 내몰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시인의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이는 비현실적 상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근거한 상상은 현실을 떠받치는 나침반입니다. 이를 따라 나아갈 때, 안전한 지대에서 갈망하는 구원은 현실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안전한 지대는 병상에서, 거리에서, 무덤 앞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실존의 자리에서도 모든 이들이 희구하며 동시에 체험하는 여백으로 꼭 필요합니다.


정리하면, 신학과 함께 걷는 문학은 단지 글만이 아니라 땅의 사람들 삶 자체로도 드러납니다. 고정희의 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를 간과하지 않았는가. 나 역시 신학에 물든 이로써 문학이 제안하는 상상 현실을 공감하며 걸음을 이어가려 합니다. 그 여정 속에서 내가 직면한 세계의 난관을 해석하는 방향이 더 분명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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