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희망과 격려의 발라드

추모의 계절

by 푸른킴

1.

개그계의 어른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 그의 장례식이 엄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떠나는 자리를 보며 그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면, 고인의 삶은 후회 없을지도 모르겠다.


자주 다른 이의 부고를 듣는다. 그 궂긴 소식을 들으면, 나는 소천하신 양가 부모님, 그들이 가루로 머물러 있는 추모관을 떠올린다. 1년에 네 번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 공간에서 귀천을 추억하는 시간은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을 남긴다.


지난 8월에는 장모님의 3주기가 있었고 10월에는 나의 어머니의 8주기가 돌아온다. 이제 그분들의 삶은 땅으로부터 자유로워 영원의 공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을 테다. 그런데도 여전히 땅에 갇혀 사는 나는 미적미적 그 아쉬움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갈때마다 하늘은 평소보다 푸르다.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이 추모 공간은 초대받지 않은 낯선 집에 들어설 때처럼 걸음이 더디다.


안치된 공간 앞에 들어서면 잠시 침묵한다. 가족들이 함께 기억하는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를 함께 부른다. 시편 4편을 읽는다. 마지막 구절(6절)에서 위로의 손이 우리를 다독인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 이다.”)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귀천한 어른이 마음으로 남겨둔 유언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장모님의 안치함 앞에서 함께 여행하던 날 찍었던 푸른 사진이 바람 따라 살랑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침묵을 깨고 추억들을 소환한다. 추모관 밖으로 나오면 유리창에 비친 하늘 따라 손에 들린 여행 가방이 더욱 짙게 푸르러지는 듯하다. 추모는 행복한 과거에 기대어 아련한 미래를 다독이는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발라드다.


2.

몇 번 들르지도 않는 이 추모 공간은 언제나 몸을 위압했다. 그런데 어떤 날은 가볍고 신선했다. 그날은 기타 선율에 실려 흐르는 음악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검은 공간이 오히려 가볍고 단순한 일상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몄다. 이 연주는 어릴 적 느릿한 카세트테이프로 들어둔 것이 여전히 떠오른다. 우연이라지만, 각인된 은총이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노래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Ballade Pour Adeline, 1976 폴 드 세느비유 작곡, 리처드 클레이더만 연주)”였다.


음악을 따라가다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에 작고 검은 스피커가 꽃처럼 달려있었다. 그 아래 잠시 서 보았다. 산들바람이 불고 바람이 마음에 스치운다. 음악은 반복되었다. 끝나지 않을 음악의 여운을 뒤로하고 몸을 돌이켰다.


점심 식사 후 차를 타고 근처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들어갔던 길로 되돌아 나올 코스였다. 일부러 느릿하게 운전했다. 그사이 잔잔한 호수 위로 그 익숙한 기타 연주가 덮였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길을 조금 더 달렸다. 어느 도로를 빠르게 지나다 우연히 낯설게 자리한 큰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옛 카페 이름이 그때도 생경했다. 홀은 다른 업종으로 변경되었지만, 지붕 위에 옛 상호 만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존재하라(Be), 소유하라(Have).’

자주 이 존재와 소유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낮이라 빈 곳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공간이란 늘 그렇다. ‘존재하니 소유한다.’라는 것.


하지만 어떤 날은 ‘보이지 않는 그 존재함,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존재를 보이듯 소유한다.’라는 뜻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커피 맛은 선명하지 않았고 미묘했었다. 그러나 커피는 여전히 커피였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부모님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추억했다.


3.

지난 202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중견 소설가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서울:문학사상, 2023)이었다. 이 소설은 “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 한 송이, 해별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이라는 긴 단락으로 끝난다.


작가의 수려한 문학 기교는 이 처음과 끝 사이에 질병과 싸우며 폐가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현실 같은 상상의 대화로 채워 넣는 것이다. 결국, 자기만을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고쳐 곧 끝날 듯한 미래를 살아내려는 인간의 분투를 엄마와 딸의 대화로 살갑게 풀어낸다.


4.

이 소설 속에서 히브리인들의 시편 23편이 재생된다. 죽음의 계곡에서 폐가를 고쳐낸 한 사람의 삶에서 희망이 소생한다. 돌아갈 집을 상상하였기에 그 집을 지금 여기에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한 몸의 이야기로 살아난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죽음 계곡으로 밀려 들어가는 이에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가장 살아있을 만한 미래 공간, 몸 하나 안락하게 쉬게 할 만한 안식 공간은 어디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 소설과 시편을 나란히 두고서 자기 몸 하나로 충분하다고 답할 수 있다. 돌아갈 야훼의 집이 있어 그 미래의 집을 가졌으므로 지금 폐가를 고친다. 머물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몸 하나가 살아낸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담보하는 집이 아니다. 나의 여릿한 몸, 나의 살로 분투하며 빛나게 빚어낸 삶이 곧 나의 최후의 안식 공간이라는 것을 서로 옹호한다.


미셸 앙리의 도발적인 주제인 『육화, 살의 철학』(박영옥 역)(서울: 자음과모음, 2021)은 이 삶을 변호한다. 죽음을 향해 내몰리듯 밀려가는 인간에게 가장 영원한 안식 공간은 곧 자기 몸에 새겨진 삶 그 하나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설과 철학의 옹호 아래서 죽음의 추모와 시편 23편, 그리고 ‘스윗 홈’이 겹쳐진다. 그리고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기타 연주곡은 자기 삶을 최후 안식 공간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격려와 희망의 발라드라 할만하다. 다시 그 추억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Memento mori! Memento vivere!

떠난 이들이 삶으로 남겨준 그 지혜로 오늘 나의 삶이 나아갈 길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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