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문학에서 배우는 신의 통치 철학

-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시대적 함의

by 푸른킴

나는 이 글에서 문학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 희망은 저항을 통해 선취되는 신적 선물이다. 문학에 따르면, '산하(山河)와 민초(民草)'는 그 통치를 담지하는 통로다. 이를 통해 나는 어떤 절망의 시대라도 희망을 갈망하는 인간이 절망의 현실에서 '신의 통치 질서'를 발견하고, 그 질서를 '저항'이라는 실천을 통해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사유와 그 실천의 프락시스를 문학과 철학, 신학으로 이어보려 한다.




인간을 붙들어주는 문학

소설가 고(故) 이병주(1921-1992)는 특별한 삶의 이력이 있다. 알려진 대로, 그의 문학 밖 삶은 가난하거나 항쟁과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적 삶이라는 비평도 여전하다. 그러니 그의 문학과 생활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조국 부재와 산하의 찬사라는 ‘이념과 땅의 삶’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삶 속에는 문학적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그를 붙잡았던 것 같다. 그는 문학적 삶과 실제 삶을 분리하고 싶었을까?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세월을 거슬러 오늘 그의 문학이 나의 삶에 가끔 재생된다는 점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소설가 공지영은 이병주 전집 출간을 기념하여 기고한 에세이에서 그를 추억하며 무한한 감동을 헌사했다. 특히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을 인용하여 “진실이 가지는 진정한 이점은, 그것이 진정으로 참이라면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것이 다시 참임을 밝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데 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한겨레 신문, 2006. 4. ‘책과 생각’). 이 회상은 분명 빈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 회상의 어조는 무슨 이유인지 이병주에 대한 슬픈 논조로 스며든다. 이 무슨 난감한 이유인가. 그의 문장은 자기 밖을 향해 가난하게 강직하고, 자기 안으로는 부유한 채로 유약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그가 포효한 문장에서 한 인간이 가진 슬픈 자아상을 함께 읽으며, 문학이 연약한 인간을 지지하고 희망을 일깨우는 순간을 만끽한다.


“조국이 없다,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


이병주가 1960년 12월에 「새벽」 지에 실었던 ‘조국의 부재’라는 논설의 첫 문장이다. 이 단호한 문장은 마무리 단락에서 다시 이렇게 변주된다.


(4.19) 젊은 세대가 이처럼 갈앙(渴仰)의 눈으로서 돋뵈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 그들의 정열이, 그들의 포부가 버림받은 민중의 틈에서 잡초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뻗칠 때, 그때 비로소 조국에 아침이 온다. 그러나 우리들 멀고 먼 조국에의 아침이여.


글에서 기백이 보인다. 이 글은 불행히도 곧바로 당시 혁명의 의지가 하늘을 찌르던 5.16 군사 정부를 자극했다. 결국, 그는 투옥됐다. 변방의 한 군인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국가 재건’의 의지를 불태우고, 들끓어 오르는 통치 야욕을 거침없이 담금질하던 시절, ‘조국의 부재, 산하’라는 말은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허용될 수 없었다. 문학적 은유라 해도 숨쉬기로도 허락할 수 없는 표현 불가였다.


하지만 그런 문학적 의지는 이미 해방의 격동기 때부터 그를 추동했다. 그의 문학 안에서 조국은, 여전히 존재하지 못했다. 갈라진 채 온전하지 못한 조국의 반쪽 존재감을 회복하는 일은 기약 없는 ‘미래의 사건’일 뿐이었다. 그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수감 후에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문학적 시선은 남과 북, 이념의 대립을 꿰뚫어 보았다. 그 대립 관계에서 조국은 없다. 그에게 체제는 어느 것이라도 불안정하다. 껍데기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산하만은 견실하고 오롯했다. 막힘없이 여기와 저기를 이어간다. 그 산과 강은 스스럼없이 어울려 있다. 그 터에 살아가는 사람만이 산하를 닮아 온 땅에 온새로미 견고했다.

그에게 산하만이 바람직한 조국의 터전이었다. 자신처럼 상심하고 허탈한 마음에 휩쓸린 이들이 신뢰하고 자신을 내맡길 이 땅의 운명적 기반이라 굳게 믿었다. 소설 <지리산>과 <산하>는 이러한 그의 신념을 문학으로 집대성한 걸작이다. 여기서 그의 산하론은 곧 그의 인간론이기도 하다.


이병주에게 조국은 분단과 이념의 대립에 갇혀 있는 한 실재하지 않는 허상에 가깝다. 반대로 그에게 조국은 ‘산하’일 때 오히려 존재의 의의가 있다. 그 산하에 머물러 산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곧 국가나 체제 너머 존재하는 생명의 존재다. 그는 조국을 이념의 추종자가 아니라 그 땅에 생존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존재들로 규정하려 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서 인간은 산하의 도반이며, 아예 그 산하의 일부다. 인간 군상은 자기 터전 안에서 온갖 비극과 슬픔을 겪고, 또 그것을 토대로 희망을 내다보는 희망의 존재(Homo spes)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념으로만 존속하려는 조국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숨 쉴 수 있고, 안식할 수 있으며,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기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돕는 산하만이 무형의 조국인 것이다. 그에게 산하는 땅의 사람을 구원하는 체제 너머의 질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의 존재일 때 인간답다. 저항으로써 그 산하 안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내며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 그 희망을 지향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피조물이다. 결국, 이병주는 조국이 이념의 허상, 불안한 그림자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산하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서는 마지막 희망의 터라고 확신했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오늘 나도, 나에게 ‘조국은 없는 것이며 산하만 있는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나의 답은 저 문학의 패기에 잇대면서도 그 결을 조금 더 깊게 각인해 본다. 나에게도 산하는 소중하다. 그 산하만이 우리 삶의 경계를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산하가 우리 손만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 틈에서 꿋꿋이 삶을 지켜내려는 이 작은 산하를 정성껏 보듬어 안아주며 ’세심하게 ‘ 살피는 ‘보이지 않는 신의 통치’도 목격한다. 그 살뜰하고 따듯한 통치를 나는 안다.


이 통치는 신의 통치를 인식하는 ‘산하의 사람들, 땅의 사람들’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도 경험해 왔다. 창조주는 자기를 알아봐 주는 자신의 피조물, 특히 피조물로서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땅의 사람들을 ‘알아준다.’ 그들을 위해 자기 의지를 다듬어 눈에 보이듯, 또는 보이지 않게 기꺼이 실현해 준다. 나는 확실히 안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세심한 관여는 인간의 연약함과는 별개로 이제껏 ‘문학’이 지향해 온, 또 지향해 나갈 흔들림 없는 주제일 것이다. 내가 또 다른 인물을 생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홍명희의 『임꺽정』 프로젝트

달리 볼 수도 있지만, 홍명희 역시 보이지 않는 신의 통치를 문학으로 실현한 소설가일 것이다. 부족하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는 ‘민초’의 삶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일제 통치 아래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땅의 사람들에게 소멸할 수 없는 인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소설 『임꺽정』은 좋은 예다.


알다시피, 『임꺽정』은 1928년 말부터 일간지에 연재된 홍명희의 대하소설이다. 임꺽정과 그의 아우들의 기상천외한 활극이 맛깔나다. 특히 주고받는 대화들이 일품이다. 일간 소설이었음에도 대중들의 흥미를 확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장치였다. 대화는 편파적이지 않다. 오히려 등장인물들 사이에 ‘평등과 동지의식’이 가득하다. 위에서 누르는 권력의 통치에 저항하면서 아래로부터 발현하는 약자의 무력이 대등하게 아니 더 우월하게 활약한다. 권력자의 힘을 지배하는 땅의 사람들의 힘이 유쾌하게, 거침없이 발휘된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최형익이 저술이 눈에 띈다. 그는 홍명희가 주도한 소설 속 세계를 『임꺽정』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여 분석했다(2024). 서문에서 밝힌 이 프로젝트의 면모 중 나는 ‘정치 『임꺽정』’(329면 이하)을 주목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말한 정치의 『임꺽정』은 원저자 홍명희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그는 홍명희가 이 소설을 통해 식민지에 물들거나 물들려는 삶을 저항하고 봉건사회에서 쌓인 적폐로 회귀하려는 태도를 청산하기를 제안했다고 적확하게 분석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문학적 찬사와 정치 사회적 의의 중에서도 한 가지 점을 더 주목한다. 홍명희가 역사 소설의 주체를 바꿨다는 점이다. 홍명희는 역사의 주체를 ‘왕’과 ‘권세자’에서 ‘땅의 사람들’로 전환한다. 이 점은 그의 소설 첫 부분부터 암시된다(1권 봉단 편). 더 나아가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자유와 민주, 평등과 공존을 역사 주도의 힘으로 제시한다. 물론 소설 밖 현실에서는 끝내 무력에 진압되어 미완의 투쟁으로 끝났을지라도 소설 안에서 홍명희는 임꺽정의 최후 승리로 마무리한다.


이로써 소설의 목적은 명확해진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통해 그들이 평등과 저항을 역사의 동력으로 보여주려 했다. 이를 토대로 이룩한 공동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초석이라는 희망을 실증하려 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 상황을 고려하면, 그 세계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희망을 시사하려는 것이었다. 오늘 나는 홍명희의 소설을 이렇게 이해한다. 즉, 궁극적으로 종말까지 희망으로 수렴하는 정치야말로 보이지 않는 야훼의 통치라는 것이다. 이는 신의 통치를 자기 삶으로 받아들인 땅의 공동체만이 실현할 수 있는 ‘고도의 통치전략’이라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 이 암울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견인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인간다움은 인간의 권한이지만, 그것을 유지하도록 지지하는 힘은 어쩌면 인간 밖, 신의 통치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른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희망

이병주와 홍명희 이 두 소설가는 다른 시대의 사람이지만, 비슷한(?) 삶의 이력 아래 같은 문학적 지향점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국가나 이념, 제국의 힘 너머, 인간을 인간으로 다독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일깨운 것이다. 한 사람은 산하라는 무형의 조국을, 다른 한 사람은 민초의 지지자라는 유쾌한 저항자로 그 힘을 문학화했다. 다른 면에서 이런 문학화의 과정은 ‘희망’이라는 말에 닿아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선물 같은 희망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저항하는 힘을 요구한다고 주장한 이가 있다. 바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다.


그는 ‘희망’을 말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utopia)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직 아님’(Noch-Nicht, not-yet)의 현실로 꿈꾸었다. 현재는 미완의 미래인 것이다. 유토피아는 결코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실천이 끊임없이 저항하며 지금 여기에 ‘되어 가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블로흐에게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전진해서 도달해야 한다. 희망은 미래를 막연히 기다리는 감정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실천적 저항의 상상력이었다.


이처럼 그의 대작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는 그저 순진한 희망의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희망에 도달하는 불편한 길을 직시하도록 제안한다. 희망으로 가는 그 길은 곧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절망을 초래하는 것들에 대한 치열한 대응을 전제한다. 희망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 밖에서 인간의 표층을 뚫고 틈입하는 신적 선물과 맞닿아 있다.


평생 블로흐를 탐구한 박설호는 에른스트 블로흐 읽기에서 블로흐의 생각을 『꿈과 저항을 위하여』(울력, 2011)라고 갈무리했다. 그에 따르면, 인문학적 해석의 틀에서 블로흐의 희망 원리는 ‘꿈’과 ‘저항’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먼저 “꿈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구체적 현실을 선취하는” 것이다. 또한, “저항은 ‘경멸당하는 사람들’과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구체적 현실을 처음부터 구성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박설호의 분석에 의하면 블로흐의 희망은 언제나 저항을 토대로 선취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 나는 이런 주장을 이렇게 이해한다. 신의 통치 목적이 피조물의 희망을 견고하게 강화하는 것이라면, 신보다 피조물이 필연적으로 일관되게 분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저항함으로써만 신이 허락한 희망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여전하다는 것을 담지하는 것이 바로 산하이며, 민초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에게 ‘산하’와 ‘민초’는 보이지 않는 신의 통치를 담지하고 실현하는 ‘신적 희망의 통로’와도 같다.


자유와 민주로 회복되는 신의 통치

오늘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나의 산하에 온전한 ‘자유’와 ‘민주’가 편만하길 지금도 기대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이 기대는 나의 신앙에 기반한다. 나는 자유로운 세계가 무엇인지, 민주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마다 야훼를 통해 계시된 것을 따르려 한다. 야훼의 계시에서 자유는 토라(Torah)라는 그의 통치질서 속에서 성취된다. 토라가 담지한 자유는 모든 세계를 향한 말이다. 이 말은 예언자들의 저항 언어로 가시화된다. 그들이 대변한 야훼의 계시는 피조물 상호 평등한 대우와 직결된다.


이로써 ‘자유와 민주’는 한 덩어리로 야훼가 땅의 사람들의 샬롬을 위해 자기 온몸을 내던진, 절대자의 자기희생을 함의한다. 또한, 나는 야훼 계시가 철저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믿는다. 야훼는 스스로 몸을 낮춰준다. 이 땅의 사람들과 공존한다. 함께 원시 창조의 에덴으로 돌아가길 희망한다. 이를 위해 야훼는 인간보다 먼저 그 희망을 가로막는 모든 습속에 저항한다.

광장에 서야 할 신학의 희망, 희망의 신학

나는 신학이야말로 말로 땅의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학문은 현실 세계에 무력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야훼가 ‘아예카’(너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빌어 나에게 늘 묻는다. ‘아예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이 질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답한다. ‘나는 바람 부는 광장에 있다. 나는 이 광장에서 희망한다. 나의 공부는 광장에 설 때만 존재한다.’ 물론 이런 공부의 힘은 아주 미약하다. 그러나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오히려 희망이 공존한다.


솔직히 내가 경험한 대로 말한다면, 이 암울한 시대에 광장은 신학보다 어조와 의지가 강하다. 광장의 탄원이 신학 하는 이들의 현학적 호소보다 강하다. 멀리 힘 있게 날아간다. 무슨 이유인지 신학은 더는 광장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을 이어가며 내달리게 하는 동력은 ‘신학 없음’에서 더 강력해진다. 신학은 그저 자기 세계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여전히 야훼의 마음을 지식 좌판에만 펼쳐놓는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미사여구를 고르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야훼가 광장에 머물러 신학과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난다. 하여 나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광장에 설 때만 비로소 성취되는 잠정적 신학이라는 생각이 짙다.


애석하게도, 오늘 나의 신학에서도 조국은 사라진 듯하다. 인간다움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것 같다. 희망은 불씨마저도 위태로운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시 광장을 걷는다. 나를 드러내며 희망을 부른다. 무엇보다, 거리에서 잃어버린 신학의 책임을 길에서 되찾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광장은 나의 신학 교과서이며, 그 탄원이 나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광장을 걷는다. 광장을 지나 숲길로 나선다. 그 길에서 나는 성찰한다. 숲의 정점에서 나는 성소에 진입한다. 이병주의 산하, 홍명희 민초, 블로흐의 희망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를 추동한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 문학적, 철학적 통찰에 기대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장과 숲길’에서 그 무시의 힘을 확신한다. 이 숲에서 숨을 고르는 묵상의 순간, 나는 희망을 향해 전진하는 순례자가 된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기도한다. 이 산하를 민중의 힘을 통해 희망으로 삶의 사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저 에덴의 강, 그 강을 마르지 않게 하는 창조주의 정의로운 통치, 그 아래서 유한한 모든 이들이 자연스럽게 '살고 지는' 영원의 삶 말고는 없다는 것을. “내가 숨을 쉬는 동안,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ro).” 바로 지금이다. 문학은 희망의 인간학이다. 그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서 살아내도록 절망의 인간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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