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단어 59-365
무엇이 자꾸 가볍게 쓸리거나 맞닿는 소리
눈이 가볍게 내리는 소리
1.
어머니가 귀천하신 지
여덟 해, 노란 은행 단풍이 농익은 그해 가을
쌀쌀한 바람이 마음을 가볍게 쓸어간 날
그저 꿈인듯싶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실 때
젊은 시절, 흰모시에 풀 먹여 빳빳하게 날을 세운
모시옷 만들어 아버지에게 입혀주셨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요즘 시대에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나도 그 풀 먹인 옷 한번 만져본 적 있는데,
손끝에 스치는 느낌이
경쾌했던 추억의 소리.
2.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
가볍게 맞닿는 소리
쓸리는 기분이 날카롭긴 하지만
상상해 보면 오히려 기분 좋아지는 소리다.
하지만,
겨울밤 함박눈 내려
눈 위에 눈이 쓸려 사이좋게 차곡차곡 덮일 때
밤을 뚫고 퍼지는 눈의 상쾌한 향기 같은 소리
3.
‘사락사락’
소리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단어,
굳이 의미를 묻지 않아도
쓰이는 순간 글자가 말하는
‘소리의 단어’
나뭇잎 떨어져 다른 낙엽 위에 내려앉는 순간
두 잎이 만나 서로를 다독이는 최후의 위로
지난여름, 아침 해뜨기 전,
새벽이슬 맺힌 풀잎 스치며
한발 한발 걸을 때 정적 깨는
풀잎의 축가
4.
사락사락
1960년대 서울역과 남산의 밤 골목을 헤매던
젊은이의 아픈 실상을 그려낸
이문희의 『黑麥』(1963~4)에서
“나란히 걷는 두 똘만이의 어깨 위에
싸락눈이 사락사락 뿌렸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선 상처에 상처가 닿아 쓸리는
아픔을 본다.
사락사락
때론 추억을,
향기를, 위로를, 축하를
떠올리게 하는,
혼자서는 소리 나질 않아
어떤 것들이든 서로 닿아야 하고
스치며 만나야 하는
관계의 소리,
더는 상처가 아니라
상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로만
살아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