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기도시,
“그의 생애는 단아했고, 따뜻했다.”

-어느 93세 어른의 발인 예식에서 드린 기도시

by 푸른킴

(이 기도시는 현장에서 구술한 뒤, 녹취한 후에 몇 단어를 첨삭하여 문장을 다듬은 것입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는

구십 삼년의 생애를 마친 한 사람이,

마지막 순례의 길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을 돌아보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속속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비하게

그를 날마다, 날마다 만난 것 같은 느낌으로

또 어제도 우리와 함께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하며,

또 살아온 생애 이야기를 즐겨 나누었던 것 같은 상상 속에

그를 직접 대하는 것처럼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를 보는 것처럼

또 느끼지 못하는 그를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만지지 못하는 그를 만지는 것과 같은

신비한 감각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세계의 창조주 하나님!

이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생애,

구십 삼 년 동안

자신의 두 발로,

자기의 머리로,

자기의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마지막 순간,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이 짧은 시공간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갈 수 없어서

이 둘러앉은 이들의 환송의 손을 빌어야만

마지막 순례를 떠날 수 있습니다.

구원자 하나님!

이 사람의 인생에서 마지막 목적지가

하늘나라인 것을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늘을 향한 길을 나 홀로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구원의 길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돌아보면, 고인의 젊은 날은

앞으로는 용맹했으며,

뒤로도 올곧았습니다.


몸은 굳건했으며, 말은 당당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가정 안에서는 따뜻하고

다정했습니다.

출입하는 아이들을 손 벌려 안아주고

연약한 아이의 손을 잡고 발을 맞추어

걸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또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날개 치며 솟아올라간다’(사 40:31)라는

성경 한 구절을 좌우명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말씀을 평생 마음 깊숙한 곳에

견고하게 못 박아 살아왔습니다.

그 말씀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단아했습니다.

따뜻하며 사랑 가득한 몸 매무새를 유지했습니다.

보는 이들에게 평안함을 주었던

그의 행실에 감사드립니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 시간 이 작은 공간에 둘러앉아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고인을 통해서 경험했던 따뜻하고 온화한

당신의 손길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경험했던 추억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를 마지막으로 돌려보내는 이 자리가

우리의 여린 믿음이 굳건해지는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지난 평생 어머니를 통해,

자녀들을 통해,

아버지를 통해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의 말씀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견고하게 못 박아 주셔서

평생 잊지 않는 은혜의 말씀으로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작은 장례식장 골방에서 오늘

함께 듣는 이 마지막 말씀이

당신의 영원한 은혜의 손길인 것을

우리가 잊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어제까지의 믿음을

오늘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죽음으로 세상과 화목하신 하나님!

여기 모인 우리는 살아가는 장이 다릅니다.

따르는 삶의 방식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날

하늘로 돌아갈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에서 반드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자녀로 영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순례자이길 소망합니다.

이 레테의 강가가

우리 모두에게 뜻깊은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예식을 마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삶이 고인처럼 가장 미미하고 사소하게 보이는

가족들로부터 이 세계 끝까지 지극히 사랑하길 소망합니다.

누구보다 나와 화목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의 마지막 순례의 길을

누군가의 손에 맡겨야 할 때가 오기까지

진리에 순응하며 믿음으로 자신의 삶의 자리와 나의 세계를 지키며

믿음의 순례를 걸어가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

이 시간 여기 모인 우리에게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

우리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이제 발인의 길을 떠나는 시간,

그 돌아가는 발걸음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의 행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귀와 마음과 생각을 열어주십시오.

무엇보다 가장 슬퍼하며 이 죽음의 시간을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마음에,

그들의 인생에 햇살 같은 은총이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평화가 우리에게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10월 어느 날, Am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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