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기도 시》 0~10 시작 노트(1)

― 시란 세계의 소리를 듣고 그들을 위해 다시 짓는 언어의 집, 정원―

by 푸른킴
*이 글은 제가 올린 '듣는 기도 시 열한 편에 대한 개인적인 시작 노트입니다. 세 번에 걸쳐 정리할 예정입니다. '시'를 잘, 즐겨 쓰시는 모든 시인에게 작은 경의를 표합니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에 대한 언어 반응이다.
그 들림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따라 적으며, 피조물이 거할 언어의 집, 정원을 짓는 것, 그것이 바로 詩다


연작시의 배경-옛 시와 현재 경험

이 연작은 ‘시’로 시를 쓰기 위해 시작했다. 특히 오래전 내 삶에 찾아와 나를 먹이고, 다듬고, 꼬집으며 사람답게 세계를 보라고 일깨웠던 시들의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서다. 시를 쓰는 일이 소리를 듣는 일이라면, 저 옛 시인들,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소리를 실어다 나르며 생존의 방향타를 조율하는 지혜자들을 뒤따르는 일은 시를 새롭게 쓰는 일보다도 지혜로울 것이다.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이 쓰는 것은 생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러니 그들이 쓴 시는 생의 날 소리이다. 그 시절 땅바닥에서도 굉음이 울리고 길바닥에서도 아우성이 살아있으며, 하늘 저 먼 허공에서도 함성이 우렁차다는 증거의 수집물이다.

또한, 지금도 그 소리는 여전하고, 그 소리 뒤에 생의 분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공증하는 합법적 서류이다. 나의 시는 그 시들에 비해 겉멋으로 가득 찬 삶의 유희에 불과하다. 나는 시인이 아니라서 시를 그리는 정도다. 삶과 밀접해지지 못하거나 삶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다 그냥 멈춰 서고 만다. 시를 통해 나의 삶이 바다 건너 누군가의 삶에 닿는 일은 요원하다. 아니 손 닿을 거리에 있는 이, 한 호흡으로 감염될만한 밀접접촉자에게도 살갑지 못하다. 나의 시는 나의 생존을 위한 분투 그 자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분투는 이런 것이다.’라는 미메시스에 불과하다. 달리 보면, 시를 단순한 모방이라 다그쳤던 플라톤보다, 인간의 고통과 행위를 비극이라는 시 속에서 찾고, 해석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조금 더 귀 기울였다.

여태 나는 ‘시를 그저 쓰는’ 정도다. 시를 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벗어날 수는 없다. 등단이라는 공증도 없고, 시인이라는 명명도 없지만 나는 시를 흉내 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경계이기 때문이고, 내가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시인들’의 시에 담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들의 생존의 전장에서 끌어올린 시어의 탄원, 감탄, 호소, 찬가를 들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세계의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울 수 있다. 결국, 나의 <듣는 기도 시>는 시에 담긴 소리를 듣겠다는 것이고, 누군가 저장해 둔 생존의 외침을 재생하겠다는 것이고, 나도 그 생존의 탄식을 듣고 나의 생존에 견실한 이정표를 세워두겠다는 것이다.


듣는 기도 시의 시작-들리는 소리에 반응

서론 격(0)의 시는 세계의 탄생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한 아이가 분투 끝에 세상으로 나오는 그 첫울음, “아앙~” 하고 터져 나오는 생명의 탄성이 세상 모든 소리의 원형임을 깨달았다. 나의 탄생의 소리를 내가 듣지 못했지만, 나는 이 아이의 얄캉한 소리에서 나의 생존 음성을 들었다.

‘듣는 기도’는 이 생존의 울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생각해 보라, 왜 아기는 웃음이 아니라 울음으로부터 생을 시작하고 사람들은 그 울음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건네는지. 어쩌면 모든 생의 시작과 끝은 결국 ‘울음’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를 흘려보낸다. 기쁨의 소리, 슬픔의 소리, 항거의 소리, 용서의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절실한 한마디까지.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소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연작은 세상에 남지만 쉽게 버려지는 소리—미약한 한숨, 누군가의 기다림, 가난한 이들의 신음, 사라지는 존재들의 작은 떨림— 그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한 나의 기도이자 당신을 향한 고백이다.

나는 이 연작에서 세계가 내는 소리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몸과 발걸음과 눈과 귀를 동원해 시에서 삶에서 그 소리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연작의 시들이 ‘보여주는 시’가 아니라 ‘들려오는 시’여야 했기 때문이다.


연작시의 서술 방식-듣고 다시 찾은 나의 언어

이 연작에는 내가 만난 다양한 시인들이 있다. 소리의 뼈를 들려주는 기형도, 사랑의 낮고 약한 자리로 초대하는 서덕석, 생활의 미세한 음을 포착한 전남진, 민중의 가난을 노래한 신경림, 하늘을 향한 절박한 질문을 던진 신동엽, 도시의 척박한 삶을 관조하는 김광규, 시대에 여전히 항거하는 정태춘, 그리고 가난한 불의 결을 보여주는 안도현 등등.


이 들의 시는 내가 듣는 기도 시를 쓰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나는 그들의 시 앞에서, 그들이 보았을 그 세계, 들었을 소리, 하루 살아내야 할 그들의 낮고 허름한 현실에 몸을 기울인다. 이어서 그 자리에서 소리가 들릴 때 내가 겪은 하루의 일과를 정성껏 시어로 엮어 그들의 시 앞뒤에 덧붙인다. 그것이 이 연작, ‘듣는 기도’가 쓰인 방식이다. 그들의 시가 시대의 예언자로 외쳐졌지만 나에게 그 소리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들리길 은근히 바랐다. 성자와 같은 그들의 시어를 다 받아들일 수 없어 그냥 담을 수 있는 말로 바꿨으면 하는 마음만 커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흘려듣는 이 세계의 미세한 떨림, 사라지는 존재들의 고요한 외침, 희미해지는 사물들의 가득 찬 여백을, 나는 나의 눈으로 잘 들어두려 했다. 나의 연작에 <메타시>라는 이름을 걸게 된 것은 시에 대한 시를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광물을 캐듯 시어를 꺼내오려 했기 때문이다. 메타는 위로 오르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연작은 옛 시가 들려주는 소리와 함께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작은 실천이다.


시어의 선택과 배열-도석(道釋)의 결과

나의 연작에는 내가 걸으면서 보게 된 것들이 제법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연작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 대한 도석이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해석된 경험이 시어로 남겨진 그 단어가 나의 연작 시 곳곳에 알짬으로 새겨진다. 그 도석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야만 그나마 나의 졸시가 완성된다. 예를 들어 골목길 연탄재의 조용한 숭고함, 낙엽이 지는 방향, 철새가 하강하는 이유, 노인의 조용한 숨결, 한 아이가 처음 내는 울음—여기에 덧붙여 시인들에 내재한 고도의 정서가 깃든 시어들이 나에게 들리고, 그 들림이 새로운 단어로 정착할 때 나는 하나의 시어를 적을 수 있다. 이 시는 그래서 듣는 기도이다. 이 듣기는 내가 듣는 소리가 아니라 들려온 소리에 대한 나의 반응을 의미한다. 밀려나는 누군가 건네주는 간절함이며, 방치되는 세계가 호소하는 탄원이다.

이처럼 나의 연작시는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과거와 미래의 아우성을 살려내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찾아낸 나의 단어의 집이다. 누추해도 머물만한 집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듣는 기도 시 연작의 의의

연작시를 통해 나는 나를 채근한다. 이것이 연작시의 의의이기도 하다. 나는 믿는다. 듣는 자는 결국 다시 말하게 된다고. 듣는 자는 숨겨진 세계를 만나게 된다고. 듣는 자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기 생을 되묻는 자리에 서게 된다고.


열한 편의 시는 나에게 그 자리를 정위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당신을 그 자리로 초대한다면 좋겠다.
그리하여 세계의 소리를 듣는 작은 기도,
그 미세한 떨림을 함께 듣는 시간,
우리가 연대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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