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생 마치듯
벚꽃 잎 사라지려는 날
마지막 잎새
누군가 매달아 두었을까
그물 같은 나뭇가지가 놓아주지 않는 걸까
그러나
끝은 새로운 시작―
두려워 말고
마음 편히
보내다오,
막지마 저 잎새
배경
바람은 차가웠으나, 햇살이 좋은 주말 오후, 산을 좀 오르려 길을 걷다 도심의 중앙공원 옆을 지나갈 즈음, 가로수로 익숙한 벚나무 잎들이 바람을 따라 속절없이 날아간다. 그 모습 보기 좋아 눈을 들어 보니 나뭇잎 하나 남아 가볍게 흔들린다. 뜬금없이 故 박완서 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아련한 질문과 오 헨리(O. Henry)의 『마지막 잎새』라는 간절한 위로가 겹쳐진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쳐다보다 결국 사진에 남겼다. 빈 가지들은 그물처럼 얽혔고, 그 틈으로 파란 하늘이 바다처럼 펼쳐졌다. 하나 남은 벚나무잎이 언제 떨어져 나갈까 궁금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뭇가지가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대로’ 두는 것도 자연다운 섭리일 테니 나뭇가지가 저 잎새를 ‘막지 말아 달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진
기본적으로 나무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높지는 않아서 나뭇잎이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크진 않았지만, 진갈색과 붉은색이 조화로운 색상이 존재감이 확연했다. 사진 프레임 속에서 가지들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라가듯 배열했고, 나뭇잎은 오른쪽 아래 굵은 나뭇가지에 배열했다. 굵은 가지와 잔가지들이 어지럽게 엇갈려 있고, 검갈색과 진갈색, 붉은색, 그리고 파랑, 햇살에 반사된 하얀 나뭇가지에 의도했던 것보다 냉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사실, 이런 사진은 작품성을 말하기가 어색하다. 그저 남겨진 나뭇잎 하나를 담으려는 의도가 전부였으니 그것이 잘 드러났다면 충분하다.
시어
사진을 찍으며 몇 마디 시어가 마음에 떠올랐다. 스산한 가을 거리, 하나 남은 잎, 차가운 공기에 어울리는 말들. 그 순간 문득, 박완서의 싱아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스쳐갔다. 구체적 내용 때문이 아니라, 오래된 이미지가 몸에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시어는 그런 순간의 조각들이 하나의 무늬로 이어진 결과였다.
화려한 생 마치듯 / 벚꽃 잎 사라지려는 날:가로수 벚나무는 사계절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아름답다. 이 절기,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야말로 한 해 생의 마지막에 가까운 순간이다.
마지막 잎새:나무마다 마지막 잎은 있지만, 그 순간을 직접 목도하는 일은 드물다. 풍성함은 흔히 보지만, 떨어지는 찰나는 놓치기 쉽다. 그래서 ‘마지막 잎새’를 본다는 것은 슬픔보다 오히려 작은 희열에 가깝다. 시어에는 그런 놀라움이 담겨 있다.
누군가 매달아 두었을까 / 그물 같은 나뭇가지가 놓아주지 않는 걸까:이 구절은 오 헨리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쓴 오마주다. 누군가 매달아 둔 희망, 그리고 자연이 스스로 붙잡고 있는 생의 여운. 한쪽은 타인의 의지이고, 다른 한쪽은 나뭇가지의 아쉬움이다. 어쩌면 가지는 마지막 잎을 놓아 보내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 끝은 새로운 시작—:여기서부터는 내가 나뭇가지를 설득하는 말이다. 떨어짐은 끝이 아니라, 자연이 시작을 준비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두려워 말고 / 마음 편히 / 보내다오:그래서 떨어질 잎은 떨어지도록 해야 한다. 두려움을 쥐고 있는 것보다 자연의 질서에 자신을 맡기는 편이 더 편안하다는 마음에서 나온 시어다.
막지마 저 잎새:‘마지막 잎새’를 ‘막지마 잎새’로 바꾼 것은 언어적 전환이지만, 이 디카시에는 오히려 더 꼭 맞았다. 붙잡기보다 놓아주는 방향으로 감정이 뒤집히는 지점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 시어의 정서에는 크게 세 장면이 들어있다. 첫째, 계절의 정서다. 계절은 이미 ‘겨울이지만’, 나의 기억은 ‘봄’으로 되돌아간다. 이 시간적 순환은 태어남(생) → 소멸 → 회상 → 다시 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예비한다. 둘째, 인간 의지의 정서다. 마지막 잎새의 존재 이유를 인간적 관점(의지·감정)으로 질문한 것이다. 특히 나는 두 편의 소설을 통해 ‘매달아 두는’ 타율적 의지와 ‘놓아주지 않는다’는 나뭇가지의 자율적 의지를 대비해 두었다. 셋째, 심정의 정서다. “그러나 / 끝은 새로운 시작—”은 이 시어의 전환점이다. 잎의 떨어짐은 생의 끝이지만, 자연의 순환 속에서는 새로운 계절을 여는 첫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심정적 순응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잎새에게 말을 걸지만, 실상은 내 마음속 붙들고 있는 것—어떤 미련과 두려움—을 나뭇가지에 투사해 말한다. 그러나 결국 “막지마 잎새”라고 명명한 것은, 마지막 잎새를 붙잡기보다 놓아줌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자신을 맡기려는 감정적 전환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이 시어들은 나뭇가지에 투사된 나의 심정, 마지막 잎새에 비친 나의 감정이 복합된 나의 고백이다.
의도-송별(送別)의 윤리, 놓아줌의 제동철학
이 디카시는 결국, 가을의 마지막 환송 시가 되었다. 우연히 눈에 뜬 마지막 잎새는 이 가을이 필연적으로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고지해 준 하늘의 전령이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이 가야 겨울이 오고, 겨울을 넘어서야 봄이 올 것이다. 그 봄이 오면 어김없이 이 나무에 벛나무잎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벚꽃이 피어오를 것이다. 그러니 이 디카시에서 나는 붙잡고 싶은 마음과 놓아 보내야 하는 마음의 갈등을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투영하여 그려냈다. 이것은 순전히 한 그루 벚나무의 풍경, 그 이미지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하여 한 계절의 끝은 곧 다른 계절의 새로운 시작이며, 궁극적으로 이 끝과 시작은 단칼에 경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서로 ‘제동 하는 질서’(萬物齊同)에 조화를 이룰 때만 계절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디카시는 자연을 노래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내가 나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었다. 계절을 떠나보내고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잎새’를 붙잡지 말아 달라는 말은 단도직입적인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웅인사이다. 결과적으로 이 디카시에는 ‘내려놓음·멈춤·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임·만물제동의 실감’이라는 철학적 태도를 구현하려는 작은 의도도 담겨 있다.
정리
디카시는 사진-시어-의도가 조화롭게 될 때 비로소 살아나는 것 같다. 매번 연습할 때마다 이 세 요소가 절묘하게 어울리도록 애쓴다. 습작 정도의 디카시지만, 다행히 맘에 들 때가 많다. 특히 이 디카시는 평이한 사진 탓에 시어를 조금 역동적으로 실었다. 질문형 문장이 그 예이다. 또한, 마지막 단락에서는 의도적으로 시어를 뒤집어 명령형으로 제시했다. 내가 나뭇가지에게, 나뭇잎이 나뭇가지에게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나의 마음을 이 디카시를 읽어주는 분들에게도 남기고 싶었다. 계절은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니 굳이 ‘막지 말아 달라’고. 앞서 말한 대로 이 디카시는 ‘이미지의 잔상’이 시의 시작이다. 시어에 매이지 않더라도, ‘마지막 잎새’를 보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희망을 놓치지 말아 달라는 마음이 조금 들어있다. 아니, 무엇인가 ‘집착하듯’ 잡아두려는 것마저도 스스로 떠나가도록 놓아주는 것도 좋을 일이다. 오죽하면, ‘집착을 떠나보냄’, 그것을 무소유의 시작이라고 보았을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