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9. 검은 호수-시작노트

by 푸른킴

낯선 가배

물끄러미

눈으로 걸었을 옛 경계인―고종


그날

그, 잔

검은 호수 내려앉은


雨中 커피

리퍼블릭


배경

겨울비 내리던 아침, 약속 장소로 나가던 길이었다. 도로 옆으로 서울 근교 마지막 단풍이 빗물을 머금고 더 짙게 물들었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이런 날은 드립 커피가 좋겠다는 촉감이 몸을 깨웠다. 근처에 마땅한 카페를 찾으려 검색하다 마음에 드는 이름을 발견했다. 약속 시각도 맞고, 멀지 않은 곳. 도심 주택가 한복판, 조금은 생뚱맞게 자리한 공간이었다. 좁은 골목에 차를 대고 들어섰다. 테라스가 좋았지만, 비가 오락가락해 실내에 앉았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받은 드립 커피에 포트, 옛날 꽃병 같은 작은 도자기 잔이 곁들여 나왔다. 기대했던 대로 향도 좋고, 색도 마음에 들었다. 그 둥근 잔 아래 고여 있는 커피를 보니,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 해 가을, 덕수궁 정관헌. 커피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던 그날, 생전 처음 마주한 검은 물 덩어리를 바라보며 고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최초의 가배도, 혹시 이런 잔에 담겼을까. 문득, 내 앞의 진갈색 물결은 하나의 호수처럼 조용히 내려앉았다. 콘크리트 노출 벽, 그 울퉁불퉁한 회색 면에 커피잔을 가만히 세워 두고 사진에 담았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가배의 향 때문일까. 잠시, 그 옛날 그 자리로 돌아간다. 커피 한 모금 후, 그 침잠의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과거와 현재가 검은 호수 위에서 찰랑찰랑 아른거렸다.


사진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며, 움직이는 사물의 찰나를 잡을 때 빛나는 미학이다. 고정된 사물은 사진으로 남길 때 밋밋해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사물의 구도, 또는 사물들의 배치를 염두에 둔다.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기에 카메라의 각도를 움직여 순간을 담아야 한다. 이번 사진 역시 카메라를 활용했다. 작은 커피잔을 벽면에 바짝 붙였다. 회색 벽면과 진갈색 테이블을 약 1:3 비율로 구성하였다. 결과적으로 화면 구도가 안정적으로 배분되었다.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로 30도 정도로 숙여서 잔에 담긴 커피를 타원형으로 담았다. 완전히 다 보이는 것보다 이 정도 분량이 마치 호수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 잔 아래 파란 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그것은 얇은 선 정도로 처리했다. 색감이나 사물, 색의 배열이 단순하다. 무채색은 사물의 절제미를 극대화한다.


사진 속 커피는 ‘검은 호수’를 은유한다. 이로써 사진은 흰 잔과 검은 커피, 그리고 배경의 무채색 회색이 대비를 이룬다. 호수가 가진 고요함과 심연의 이미지가 잘 드러났다. 그리하여 이 커피, 검은 호수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고독과 과거의 기억을 투영하는 내면의 거울이자 사색의 공간이 되었다. 이 사진은 미니멀리즘을 구현한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핵심 정조로 삼아, 시각적 정보를 최소화함으로써 오직 커피를 통한 ‘검은 호수’ 메타포에 집중하도록 구성했다


시어

이 디카시의 시어는 두 방향에 집중한다. 하나는 커피라는 실물이며, 다른 하나는 커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오던 역사적 순간이다. 커피의 검은 표면, 화병 같은 도자기 잔의 형태,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 고종이 처음 가배를 마시던 그날의 시선을 함께 떠올리며 시어를 구성했다. 낯선 가배가 오늘날 수십만 개의 카페에서 무한히 소비되는 일상의 음료가 되기까지의 시간 또한 이 시어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거리다.


“낯선 가배 / 물끄러미 / 눈으로 걸었을 옛 경계인—고종”:고종은 처음 마주한 검은 음료가 얼마나 낯설었을까. 그래서 나는 ‘커피’ 대신 ‘가배’라는 옛 표현을 썼다. 현재에서 과거로 이동하는 데 가장 자연스러운 말이었고, 시간의 틈새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물끄러미’는 고종이 처음 잔을 바라보며 가졌을 조심스러운 응시를 담는다. 그는 시대의 전환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나라의 기운은 기울고, 외세의 압력은 짙어져 갔다. 그 속에서 고종은 무엇 하나 온전히 붙들지 못한 채, 낯선 가배의 검은 표면을 조용히 응시했을 것이다.


“그날 / 그, 잔 / 검은 호수 내려앉은”: 정관헌에 앉아 마주했을 그 검은 음료의 잔. 그래서 나는 ‘그, 잔’에 쉼표를 두어, 고종 앞에 놓인 낯섦과 망설임을 호흡으로 표현했다. 나 또한 오늘의 커피잔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검은 표면은 고종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잠시 멈춰 머리를 기울이게 만드는 내면의 호수 같다. 그 호수는 고독과 사유의 그림자가 내려앉는 자리다.


“雨中 커피 / 리퍼블릭”: 비 오는 날, 나 또한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내면이 가라앉는 시간이 있었다. 마지막 ‘리퍼블릭’은 이중적이다. 카페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고종이 결국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제국 이후의 세계, 공화국의 시대를 어렴풋이 비추는 말이다. 검은 잔 속의 호수는 고독한 개인의 사유가 펼쳐지는 공간이자, 과거와 현재의 정치적·역사적 상상력이 교차하는 자리였다.


결국, 이 시어들은 커피 한 잔이 데려간 호수 같은 시간 여행이고, 과거와 현재가 한 표면 위에서 서로 아른거리며 만나는 역사적 물결이다.


의도

나는 디카시를 통해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그 관찰의 결과를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관찰과 표현은 멈춰 있는 사물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내러티매진(Narratimagine)이다. 이 용어는 내가 만들어 사용하는 것인데, 내러티브(Narrative)와 이미지(Imagine)가 하나로 묶였다는 의미다. 나아가 나는 이 디카시를 통해 사회적 관심과 역사에 대한 이해도 염두에 두려 한다. 짧은 시어에 가장 함축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담아보려는 것이다.


이번 디카시에서 일상 속의 아주 익숙한 사물, 즉 커피 한 잔을 매개로 기호음료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꺼내 보려 했다. 특히 고종의 심란한 마음을 ‘검은 호수’라는 은유에 투사하려 했다. 또한, 그 검은 호수 위에 한 척의 흔들리는 배처럼 갈팡질팡했을 그의 갈등을 읽어보려 했다. 이로써 커피는 나에게 과거와 현재가 함께 되사는 기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보려 했다. 시간과 공간이 응축된 특이한 음료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공간의 의미와 커피라는 매개가 잘 어울리게 하고 싶었다.


정리

아홉 번째 디카시 「검은 호수」는 전체적으로 마음에 든다. 사진과 시어가 어색하지 않게 유기적으로 맞물려있다. 특히 미니멀한 구도와 단순한 이미지, 조금 장황하지만, 개인과 역사가 이어진 시어의 미학이 의도대로 잘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역사 속 한 인물의 갈등과 복잡한 심경을 오늘 나도 함께 느껴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독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도 좋다. 로스팅을 오래 하면서, 한 잔 커피가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되새겨보면 (드립) 커피는 정말 ‘검은 호수’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저 식후 음료, 기호 식품에 불과하겠지만, 어쩌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역사가 들어있을 수도 있으리라.


신문물을 눈앞에 두고 경계에 선 사람이 물끄러미 어떤 세계의 문턱을 바라보던 그 장면은 오늘의 나에게도 어김없이 겹쳐진다.


나만 그런가. 우리 시대에는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페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익숙히 머물던 자리를 잃고, 낯선 카페의 문 앞에서 다시 경계인이 되어 잠시 머뭇거리는 사람들의 눈빛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든 틈 사이에서, 고독하고 흔들리는 여린 실존을 작은 커피 한 잔이 잠시라도 붙들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허락한 가장 다정한 위로일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디카시 9. 검은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