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단상(4).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by 푸른킴

스산한 풍경, 나무의 버팀

기다림의 계절, 대림절. 서재 밖 아카시아가 기다림에 지쳤는지 죽은 듯 처연하다. 짙은 갈색 나뭇가지가 여린 바람에 더 여위었다. 버티다 부러지기도 하고, 흔들리다 버텨내기도 한다. 작은 바람에도 가지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속절없다. 날은 살갗을 에이는데, 햇살은 화사하다. 자주 찾아오던 새도 어디선가 웅크리는지 나무는 홀로 쓸쓸하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 틈에 새가 날아든다. 조가(鳥歌) 속에서 한 나무의 운명에 대한 조가(弔歌)가 자연스럽다. 여름 내내 가려졌던 건너편 하얀 아파트가 열린 가지 사이로 선명하다. 고요하다. 오늘 더욱 덩그러니 보인다.

겨울이 오면, 나무는 버티기에 들어간다. 끌어올려 둔 물이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뜻밖에 겨울 가뭄이 길어지면, 꼼짝없이 맨살로 견뎌내며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 나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매일 매사가 치열한 전쟁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렇게 견디다 보면 다시 봄이 오고, 잎이 돋을 것이다. 하얀 꽃이 피며 화려한 계절로 복귀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직 요원하다. 기다리는 과정 없이는 봄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그날이 오기까지 ‘주어지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 설령 주어진다 해도 받아들일 가지가 없다면 그마저도 무용지물이다.

저 나무를 보고 있으니, 생존은 ‘쟁취’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슬프나 견딜 만한 생각이 스쳐 간다. 모든 기다림은 버팀이라는 생존방식을 요구한다. 대림절이 버팀의 절기인 이유다.


기다림, 버팀, 생존의 비결

버팀은 짓누르는 무게를 끌어안는 분투다. 나무에는 그런 분투를 스스로 해낼 힘이 없다. 바람이 불어야 하고, 햇살이 쏟아져야 한다. 그 도움이 없이는 털어내지 못하고, 털어내지 못하면 뿌리가 뽑힌다. 뿌리가 뽑히면 생애는 끝난다. 나무는 여리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만나는 나무들은 그 여림 중에도 오히려 당당할 때가 많다. ‘하늘의 도움이 없다면’ 마냥 생존과 맞바꿔야만 하는 나무의 생애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무답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도 같다.


생각해 보니, 그 당당함은 이유가 있었다. 언젠가는 다른 나무를 위해 쓰러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친 눈이 내린 것은 그저 그 시간이 조금 일찍 왔을 뿐이다. 그것으로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 위안으로 삼는 것 같다. 생존 앞에서의, 처연하지만 단호한 수긍이다. 생존 위기 앞에서 자주 머뭇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나무는 나약한 비겁함보다 단아한 당당함을 선택했다. 그 굳건한 의지를 드러낸 ‘나무에 스쳐’ 몸이 쓰리다.

겨울에 나는 유독 나무들을 물끄러미 본다.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저 나무들’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큰 이유는, 나무처럼 나 역시 생존은 ‘하늘의 허락’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라면, 나도 나무처럼 ‘하늘의 도움 없이’는 거대한 재난 또는 삶의 작은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무처럼 수동적이며 피동적인 자기 생존의 운명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내가 여릿한 인간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일깨워 준다. 그러니 평소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계시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준비를 해 둔다. 그리고 나의 ‘도움은 반드시 적절한 때에 올 것이다’라는 확신도 물컹해지지 않도록 잘 다져둔다.

이렇게 ‘버티는 나무’를 떠올리다 보니, 실제로 내 곁의 나무들이 어떻게 쓰러지고, 또 그 쓰러짐이 어떻게 내 길 위에 흔적을 남겼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나무의 쓰러짐, 길의 보수

서재에 겨울 오후는 빨리 저문다. 평소보다 이른 오후에 근처 둘레길을 걷는다. 서너 시간만 들이면 호젓한 숲길과 산길을 내 것처럼 누릴 수 있다. 요즘에는 한쪽 길이 보수 공사 중이다. 작년 이즈음 폭설 이후 길이 아주 거칠어졌다. 습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진 나무들이 많아서다. 오랜 기간 곳곳을 새롭게 다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걷고 싶은 길을 막아 두어 부득이하게 돌아가야 할 곳도 있다.


나무가 쓰러진 이유는 간단하다. 나무 끝 가지들에 너무 많은 습설이 쌓였고, 다 녹지 않아서 무거워진 가지를 나무 기둥이 버텨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뿌리내렸다는 흙더미도 겉으로 보기보다는 의외로 얕았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해 기다림도 물거품이 되었다. 나무가 쓰러지고 길이 다시 놓이는 과정을 보며, 내 생존과 타인의 생존이 어떻게 서로의 버팀이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무의 가치 – 존재 이유와 생존 방식의 인식

이런 나의 태도와 확신을 강화해 주는 것이 바로 저 나무들의 생존 방식이다. ‘주어지는 것’에 대한 운명의 수용과 ‘도움 없이는’이라는 연대감의 용기다. 내가 이 나무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를 떠올리는 이유다.


결국, 나무의 생존 방식은, 내가 오래 묵상해 온 한 기도문을 다시 불러낸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너무 익숙해져 버려 오히려 잘 듣지 못하던 그 기도다. ‘예수의 기도’에는 삶에 필요한 요목을 채우거나 기적을 기대하는 생존 기법이 희미하다. 오히려 운명과 연대감을 촉구하여 내 약한 의지가 더 왜소해지지 않게 하는 성명서로 가득하다. 매 순간 하늘과 땅의 은총이 없이는 맨몸으로 이 세계를 순례할 수 없다는 선언문으로 충만하다. 이처럼 나무의 삶은 예수가 산 위에서 가르쳐 주었다는 기도문으로 나를 이끌어, 끝내 대림절의 기도문으로 선언하게 한다.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 중 운명과 연대감을 일깨우는 대목은 두 곳이다. 하나는 신을 부르는 첫대목이다. 나는 이 구문을 ‘이 땅 모든 곳에서 역동하는 야훼(God acts!), 나-너-그것의 창조자이며 구원자, 보호자이신 야훼여!’라고 다시 쓴다. 이 구문은 예수의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 선언하는 출사표이다. 다른 하나는 하루 치의 양식이다. 나는 이 삶의 질서를 붙들고, 이 신자본주의적 세계를 버텨내야 한다. 하여 다른 이와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버티게 하는 그를 내가 버티게 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두 구문은 나의 생존에 대해 대림절의 묵상으로 이어준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일용할 양식’, 나의 야훼와 이 세계의 동지들의 ‘연대’로 내 삶은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다.


버팀이라는 생존 가치

겨울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창밖 나무와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예수의 말은 동시에 내 삶에서 섞인다. 그래서 나는 이 겨울에 다시 그렇게 기도한다. ‘생존 위기에 비겁해지지 않아야겠다. 날마다 출정하듯 이 기도를 일용할 양식처럼 되새겨야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이 땅에서 그 삶의 방식을 용기 내 한 걸음씩 따라가야겠다.’ 오늘도 어제보다 쓸쓸해진 나무를 본다. 그러나 그 나무속에 흐르는 단호한 의지를 본받아 나의 미미한 결단을 돋운다. 기다림은 버팀으로, 버팀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나무의 순환이 대림절의 의의를 오늘따라 더 결연하게 만든다.


그리고 쓰러질 듯한 나무속 수맥을 따라 예수의 생존수가 시나브로 스며든다. 풍요롭고, 깊으며, 의로운 지하수다.


내가 묻는다.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
“그대의 봄이 올 때까지.”

살아난 나무가 내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살갑게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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