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식탁의 재건: 해결되지 않은 질문

내러티매진 Narratimagine-사도들의 길, 우리의 걸음

by 푸른킴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데오빌로는 시종에게서 L이 인편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굳이 덧붙일 말이 있었나?’ 궁금해하며 편지를 건네받았습니다. 가벼운 눈웃음을 남기고 디스마스가 물러갔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어제와 달리 오늘따라 더 단아했습니다.


“데오빌로님~ 이곳은 날씨가 조금 덥습니다. 계신 곳은 어떨까요? 모쪼록 신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두 번째 펀지를 어떻게 읽고 계신지 궁금해서 가볍게 몇 글자 덧붙이려 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제 편지를 읽으실 때는 꼭 첫 번째 편지를 가까이 두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편지는 첫 편지가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배우셨을텐데, 두 편지는 ‘서사적 전진’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서로서로 이해를 돕는 ‘본문상호간 맥락’을 고려해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6~8절이 그렇습니다. 이 몇 구절은 첫 편지를 아우르면서 앞으로 읽게 되실 이야기들을 함축하는 알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단락까지는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심정까지 면밀히 관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즉 보이는 글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글의 무늬까지 살펴주십시오. 혹시 어렵거나 해결이 안되는 궁금증은 언제든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바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그대에게!”


‘보이는 글과 보이지 않는 글의 무늬?’


어려웠습니다. 대락 이해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선생 L이 일러준 지침이니 그대로 한번 해 보기로 했습니다.


“디스마, 디스마, 보리차를 좀 큰 잔에 부탁해”


평소와 달리 귀한 얼음이 담긴 시원한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는 그의 얼굴이 햇살 아래서도 빛날 것만 같았습니다. 얼굴이 언어라면, 요즘 그는 화려한 문장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글을 분명 모를텐데 말입니다.) 그가 나간 뒤에도 그의 얼굴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궁금했습니다. 어쨌든 오늘도 어제처럼 뭔가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첫 구절부터 어둠이었습니다.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자, 천천히 한 글자씩 들여다보면서, 말하는 이들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그러나 이해는커녕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난감한 마음에 차를 손에 들고 가만히 글자를 바라봤습니다. ‘글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첫 편지를 활용해서’ 등. 선생 L이 일러준 지침들을 모두 꺼내가며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생각나는 대로 메모했습니다.


‘모였을 때에’, '그 목요일 밤의 재건인가? 죽음 후 40일에 담긴 예수의 의도가 이것이었을까? 죽기 전 그날 그곳에 죽음 후에 다시 만난 기분은 어떨까? 예루살렘 한복판 그 작은 방, 희망과 절망의 혼주, 포도주를 배신의 상징으로 오염시킨 그곳, 잊지는 않았지만, 배신한 애인을 기억이 짙은 곳에서 대면할 때 오는 어떤 미련한 기대와 당혹스러움의 혼감...그런데도 만났다고, 모였다고?’


데오빌로는 이 문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지만, 잠시 멈추고, 다음 글로 넘어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일단, ‘여쭸다’는 말이 생경합니다. 제자들이 겸손해진 것이 싶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죽음 후 다시 나타난 예수가 실물인지 아닌지 아무리 확인해도 받아들이 수 없는 잔금이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영락없는 사람, 의심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사람같았습니다. 은근히 동질감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조금 안되되어 그 다

음 질문이 눈에 확 박혔습니다. ‘그렇지, 재건을 물었구나?’ 제자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니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에이 엔 토 크로노 투토 그 때가 이르면


그런데 선생 L의 지침을 떠올려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강한 의지와는 달리 긴장한 표정입니다. ‘이스라엘 회복’이라는 옛 의지가 여전하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저 ‘에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 말 속에 그들의 표정언어가 보입니다. ‘혹시~’라는 말이 확성기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것이, 지금 크로노스입니까?’


제자들에게 절망했던 ‘국가 재건의 확신’이 되살아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돌다리를 두드리는 경계심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데오빌로는 이 모호한 태도에 잠시 멈췄습니다.


‘선생 예수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 다시 그날처럼 함께 모여있는 이것에 대한 기시감, 데자뷰가 그들의 심정을 가다서다하게 했던 것 같네. 트라우마인가?’


데오빌로는 그들이 ‘지금이 그 때인가 물었다’는 것에서 “혹시 지금 이 상황이 하나님이 개입하는 시간입니까?”라는 뜻을 읽어냈습니다. 처형되었던 선생이 다시 살아난 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은근히 공감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웅의 귀환’ 서사에 너무나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데오빌로는 첫 편지를 펼쳤습니다. 혹시 해석에 도움이 될만한 구절이 있는지 열심히 찾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지않아 이스라엘을 풀려나게 할 분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지가 3일째입니다.”(첫 편지 누가복음 24:21)


‘그랬군. 그들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갖고 있었어. 혼란스러웠을텐데, 그게 지금 현실로 나타났으니 더 놀랐겠지. 때론 의외의 확신이 더 의심스러운거니가. 하지만 인간에게 실현불가능이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고 지금 이 다락에서 다시 모여 옛 추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개입한 때, 크로노스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보다 상황은 신중하게 흘러갔습니다. 편지 속 제자들도 서두르지 않았고, 편지 밖 데오빌로도 성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두 선생 예수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기대반, 불안반으로. 은근히 확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도 비겁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라면 그것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 자신도 온유함으로 포장된 회피로 이 일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데오빌로는 이 대화 끝에 선생 L이 쓴 한 단어에 다시 눈과 마음이 걸렸습니다. ‘프로스’. 평범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 대화에서는 선생의 얼굴이 담긴 듯합니다. 단호하진 않지만, 은근한 부정의 의미가 실려있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를 대(對)하여라니, 제자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건가? 이젠 완전한 실망인가?’ 눈을 보고 말하는 사람, 말의 단호함은 말투가 아니라 눈일 때가 많습니다. 선생 예수는 여전히 옛 추억에 착고가 채워진 제자들을 단단한 부드러움으로 응시했습니다. 데오빌로도 그 눈길에 다음 문장으로 이어가기 주저되었습니다. 한번 실망이 두 번 반복될 때 심정적 좌절감이 얼마나 센지 데오빌로는 모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걸 깨뜨리는 온화한 신념은 또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습니다. 이 회한 어린 대화에서 은근히 희망을 내다보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게 최후의 대화는 아닐 거야.’


똑똑


‘뭐지? 디스마스인가?’


“들어와”


하지만 인기척이 없습니다. ‘바람인가?’

그 사이 마음의 긴장이 가볍게 풀렸습니다.

너무 신경쓴 듯 하여 펜을 내려놓고 아직 시원한 보리차를 가볍게 들이켰습니다

맛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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