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詩 - 길
1
한 번쯤 이런 동요를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독일 구전민요, 윤석중 작사>
이른 아침 약수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보이는 듯합니다. 문득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토끼는 세수하러 왔다가 그냥 물만 먹고 갔을까요?
2.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옹달샘이 너무 깊은 산속에 있어서 오다가 새벽이슬에 조금씩 씻다 보니까 다시 씻을 필요가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세수를 하러 왔으면 수건도 가져왔을 것인데, 아마 옹달샘에 와서는 자기가 뭐 하러 왔는지 까먹었을 것이다.' 또 이런 설명도 있습니다. '옹달샘이 약수터라서 사람들이 먹는 물에 세수하면 싫어하니까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그럴듯한 설명일까요? 하긴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토끼는 오는 중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세수는 하기 싫고 물만 먹고 싶었던 거지요.
토끼 이야기에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답이 없어 보여도 길을 가야 하고,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적절한 지혜를 묻는 일들 말입니다. 예측할 수도 없는 긴박한 일들이 틈을 주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일에 직면할 때마다 동분서주합니다.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면 지혜는 더욱 요원합니다.
3.
고대 히브리인들의 성서 중 하나인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맡겨라 야훼에게, 너의 모든 마음으로,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도록!
너의 모든 '생활패턴'(길들)에서 그를 반복적으로 알려고 공부해라!
바로 그분이 너의 모든 오솔길들을 장애물 없이 매끈하게 만들어 이끌어가시리라
(잠 3장 5-6절, 개인 번역)
이 잠언 구절에는 '길' 이 있습니다. 이 길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앞면은 잘 닦인 길입니다. 자신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길입니다. 뒷면은 산속 오솔길처럼 울퉁불퉁합니다. 구곡양장(九曲羊腸)같습니다 구불구불하며 작고, 좁고, 불편한 길입니다. 이 두 길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히 좁고 불편한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을 눈여겨보았습니다. 평탄 대로는 훈련을 위해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비포장 같은 위태로운 길에 직면할 때를 위해 연습하는 길입니다. 고대인들은 대로를 걸을 때 오솔길을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자신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4.
고대인들의 어법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단수를 복수를 쓰는 경우입니다. 그들은 '길'이라고 쓸 때와 '길들'로 표현할 때 다른 의미를 제시합니다. 복수형 '길들'은 길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길을 숱하게 걸어서 굳어져버린 모습입니다. 사람에 비하면, 반복적이고 익숙해져 몸에 박힌 '생활방식(modus vivendi)입니다. 그 사람이 걸어온 흔적이며, 그의 몸에 익숙해진 일종의 '하비투스(Habitus)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정되기도 어렵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맡긴다'라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고통 같은 오솔길, 척박한 길에서가 아니라 '탄탄대로'에서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평탄한 자기 삶을 신의 의지에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대히브리인들은 그것이 역설적으로 울퉁불퉁하고, 장애물 투성이의 길을 걸어가는 지혜라고 수긍했습니다.
5.
'길'을 찾아서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길은 '올레'라는 이름으로, 어떤 길은 '둘레', 또 어떤 길은 '갈레'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한번 그 길을 걷고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그 길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의 순간에 길을 걷습니다. 삶이 미로처럼 꼬여버렸을 때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순례자는 평탄한 길을 걸을 때 다시 길을 연습합니다. 몸에 새겨져 평안한 삶의 자리에서, 또 막힘없이 질주하는 길에서 투박한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섭니다. 내 길에 다림질이 필요 없을 만큼 말끔한 때에 일부러 굽어있고, 울툴불퉁한 비포장 길에 들어서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구도자라는 것입니다.
6.
정희성의 시 <길>은 평탄 대로에서 오솔길을 걷는 그런 '일상적인' 구도자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평안하게 갈 수 있는 길에서 스스로 오솔길을 걷는 용기를 가진 자 말입니다.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 비평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