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낯선 것들(피와 유두)의 조합에 나와 엄마는 고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왕좌왕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누구라도 그랬을 것 같이 인터넷에 '가슴에서 피가 나면 무슨 과'를 검색했습니다. 그 사이 엄마는 지역 대학 병원에 전화를 했고 우리는 같은 답을 얻었습니다. ‘유방외과에 가보세요.’
유방외과는 커다란 3층짜리 건물로, 자주 지나다니던 중심가 대로변에 있었습니다. 이런 게 있으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꽤 유명해 타 지역에서도 찾아온다고 하더니 병원 접수대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문 앞에는 남성들이, 그 옆 소파에는 여성들이 모여 앉아 있었는데, 남성들이 어찌나 문에 바짝 붙어 있는지 접수대 직원이 문 앞에서 큰소리로 "안쪽으로 들어와 주세요"라고 외치며 손짓할 정도였습니다.
안내대로 탈의실에서 검사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검사복은 안쪽에서 한 번, 바깥쪽에 한 번, 끈으로 묶는 구조였는데 속옷을 벗고 그거 하나만 달랑 입으니 제대로 여몄다고 해도 어쩐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어깨가 자꾸만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문 앞에 모여 있었나 봅니다.
진료실로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당신이 아침에 본 당혹스러웠던 상황을 의사에게 털어놨습니다. 의사는 엄마가 쏟아내는 말들을 쭉 듣더니 내게 가슴을 좀 보자고 했습니다. 대기실에서는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더니 의사 앞에서는 영락없는 고자질쟁이가 된 것처럼 의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옷 섬을 열었습니다. 이것 좀 어서 해결해주십쇼 하는 마음으로요.
의사는 내 오른쪽 가슴을 이리저리 보더니 지그시 눌렀습니다. 그러자 다시 피가 흘렀습니다. 의사는 커다란 거즈를 겹겹이 접어 줄줄 흐르는 피를 막고는 말했습니다. "음, 초음파 검사를 좀 해봐야겠는데요."
간호사 두 명과 의사 그리고 만세 자세를 한 채 누워있는 나는, 다 같이 검은 배경에 흰색 물결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초음파 화면을 봤습니다. 검은 밤바다에 흰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고래의 뱃속 같기도 한 화면에 낮게 쿰쿰하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내 마음도 같이 쿰쿰댔습니다. 의사는 둥글게 뻥 뚫린 어느 특정 부위들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여러 번 되돌아가 확인했습니다. 검사가 끝났는지 작은 담요 한 장을 내 상체에 덮어주고 검사실 불을 켰습니다.
“왼쪽에는 물혹 두 개, 오른쪽에는 물혹 하나, 종양 하나가 있네요. 물혹은 이제 바늘로 뽑아서 없앨 거고 종양은 마취하고 조직 떼어내서 검사할 거거든요. 근데 걱정 마세요. 양성일거에요.“
검사실 불이 꺼지고 간호사는 내게 덮었던 작은 담요를 반으로 접어 오른쪽 상체만 가렸습니다. 그러고는 내 머리맡으로 와 만세하고 있는 내 손을 잡았습니다. 간호사가 왜 내 손을 잡는 걸까 생각하는 찰나 따--끔하더니 초음파 화면으로 바늘이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바늘이 뻥 뚫린 원형에 가까워질수록 찌릿함에 눈이 감겼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계속 보고 싶기도 해서 한쪽 눈만 질끈 감고 대신, 감지 않은 반대쪽 눈만큼을 간호사와 맞잡은 손에 쏟았습니다. 뻥 뚫린 원형은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졌습니다. 원형 세 개를 모두 없앤 의사는 내게 이제 조금 각오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난 어떤 각오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었지만 어찌 됐든 의사가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전 보다 더 긴장이 됐습니다. 오른쪽 가슴에 마취 주사 두 방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다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간호사까지 합세해 내 몸통을 잡았고, 의사는 캔들 라이터의 생김새를 한 기구를 꺼내 대충 어떤 식으로 조직을 뗄 건지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나를 붙잡은 두 간호사와 뭔지 모를 기구에 긴장감이 고조되어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멍하니 있었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바늘 들어가는 순간 숨을 참으세요. 좀 덜 아플 거예요."
의사의 말대로 난 숨을 있는 대로 들이마신 채로 숨을 참았습니다. 두 간호사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습니다. 기구가 둔탁한 '땅'소리를 내며 조직을 뜯어갔습니다.
각오라는 것이, 마취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마치 휘릭 소리를 내는 낚싯대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낚아채갔습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질끈 감은 양쪽 눈만큼 아주 세게 간호사의 손을 잡았습니다. 간호사의 '아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걸 알았지만 의지와 달리 간호사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맞은편 엑스레이 검사실에서 내 이름 불렀습니다. 엑스레이 검사실은 초음파 검사실보다도 더 어두워서 기계 불빛과 방사선사의 움직임만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더듬더듬 기계 앞에 서자 어둠 속에서 방사선사가 말했습니다. "팔 벌리시고 기계 앞에 바짝 서세요." 팔을 벌리고 기계 앞에 바짝 붙어 서니 방사선사가 내 가슴을 어떤 틈새에 넣고 이리저리 끼워 자리 잡았습니다. "숨 들이마시고 참으세요. 몸 세우시고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시면 다시 찍어야 돼요." 엑스레이라는 건 찍힌 줄도 모르게 끝나는 거 아니었나요. 그 어떤 틈새는 점점 좁아지더니 내 가슴을 없앨 기세로 납작하게 눌렀습니다. 가슴과 함께 끌어 모인 위아래의 살들도 점점 끌려들어가 구부린 어정쩡한 자세가 됐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어느정도였냐면 더 이상 납작해질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러다가 짓이겨지겠는데? 할 정도로 끝없이 조여왔습니다. 마침내 풀려나자 기계 위로 피가 흥건했습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가슴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슴만큼이나 너덜해진 마음으로 대기실 소파에 앉아 이름 불리기를 기다리는데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난제를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 뒤에나 올 것 같은 안도감이었습니다. 아 맞다 면접. 면접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이죠.
집으로 가는 길, 아빠에게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날씨 좋다.면접 잘하고 와. 점심 맛있는 거 사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