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어떤 것보다 낫다’는 말은 잊힌 긍정의 이면을 끄집어내는 말이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은 우리의 감정에 등급을 매겨 '어떤 것보다는 낫다'는 말을 누군가의 상실을 별 것 아닌 상실로, 누군가의 두려움을 별 것 아닌 두려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령 폭력보다는 폭언이 낫다거나, 성폭행보다는 성추행이 낫다거나, 얼굴을 맞은 것보다는 안 보이는 데 맞은 게 낫다거나 하는 말들처럼 말입니다. 내 가슴도 그런 취급을 당했습니다.
나는 고작 가슴 한쪽을 잃은 것에 슬퍼하는 나약한 이가 되었고, 나의 상실감은 그 자격을 잃고 별 것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실은 우리에게만은 매우 절대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내 가슴 한쪽은, 중요한 소개팅 날 아침 코 옆에 난 뾰루지, 나머지는 다 맞았는데 마지막에 바꿔서 하나 틀린 수학 문제, 이런 것들과 같습니다.
나는 세상이 매긴 등급으로부터 벗어나, 상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한 없이 좌절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낫거나 무엇보다 더하다고 생각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냥 그 상실 그대로. 나는 가슴 한쪽이 다르면 앞으로도 다르게 살게 될 겁니다. 다른 가슴 한쪽이 때때로 나를 좌절케 할 수도 있습니다. 목욕탕이나 사우나에 가는 것이 아직은 주저되고, 민소매 티셔츠도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가슴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지만, 나는 가슴에게 찾아온 상실을 숨기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다른 상실이 오지 않는다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계속 울고 싶으면 울겁니다. 사람들은 울지 말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노래도 나는 싫습니다. 왜 우는 것에 그리 냉정한지, 우는 것도 웃는 것만큼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울면 정말이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온 듯 전신이 개운해집니다. 하지만 대놓고 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놓고 울면 옆 사람이 슬퍼지니까요. 나는 개운해지고, 옆 사람은 심각해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뒤에서 몰래, 혼자 있을 때 개운하게 울겁니다.
영영 지나지 않을 것 같이 힘든 순간도 언젠가는 과거의 일이 됩니다. 나는 나의 순간들을 저만치 놓아두고 벌써 이만치 왔습니다. 나는 지금 서른이고 이제 곧 서른 하나가 됩니다. 완전한 절망은 아직 나의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