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오이 Oct 19. 2022

최대치의 해방과 젊은 투쟁자

04.21 ~ 04.25

1일 차

원래대로라면 복원 수술은 푹푹 찌는 8월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취소자가 생겨 4월로 앞당겨졌습니다. 이로써 쾌적한 여름 나기가 가능해질 테고 사회로의 복귀가 조금 앞당겨지겠지요. 6인실의 입구 쪽 침대가 내 침대입니다. 창가에 비해 답답하긴 하겠으나 이번에는 오래 입원하지 않을 예정이고 또 간이 세면대가 있어 크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입원 기간에 대해 교수님이 따로 말씀하신 건 없습니다만, 지난번 만난 2인실 아주머니나, 맞은편 대각선 아주머니의 경우를 봤을 때, 수술 다음날이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달 전에 이르러서야 나는 나를 짓누르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 이제 내일이면 피부 아래로 들어 찬 확장기와도 이별할 겁니다. 아직까지도 복원 수술 후의 모습이 상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써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해방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2일 차

오후 1시에 시작된 수술은 4시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실리콘으로 바뀐 가슴이 당장에 가벼워진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보다 먼저 느껴진 건 복부에 가해진 타격, 그에 대한 후유증이었습니다. 꽉 조여진 복대 아래로 배가 칼에 고루 쑤셔진 것처럼 욱신거렸습니다.


병실 불이 꺼졌는데 새로운 환자가 왔습니다.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금식 시간을 늦춰달라며 두 차례 간호사를 바꿔가며 난리를 피우다가 전공의와 꽤 오래 실랑이를 했습니다.

한 번도 금식 시간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도 실랑이를 하는군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정 금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이번에는 퇴원을 미뤄달라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아마 그 순간 의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거나 양손을 허리에 올린 상태였을 것 같습니다. 의사의 한숨 소리와 맥이 빠진 목소리가 낮게 깔렸거든요. 의사는 설득의 말을 하다가, 아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며 현실을 자각했지만 차마 웃을 수 없어 헛기침으로 무마하려는, 그런 실소를 터뜨렸습니다. 때문에 두 겹의 커튼 너머 우리도 함께 웃음이 났습니다. 결국 의사는 얼렁뚱땅 도망치듯 나갔습니다. 매우 신선한 실랑이였습니다.


그 자는 보호자인 엄마와 함께 봉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자정까지 먹으며 절대 퇴원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을 주고받았는데 내일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3일 차

나는 상당한 속도로 회복하고 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았던 것들은 금방 떼어갔고 아침에는 침대를 세우고 밥을 먹었고, 소독실에도 내려갔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퇴원하라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지방 이식으로 배가 무척 아픕니다. 복부를 집중 타격당한 것 같아요. 웃을 수도 없고 기침도 할 수가 없습니다. 배꼽 절개 부분을 소독해야 해서 복대를 풀러야 하는데, 온몸이 벌벌 떨리고 끙끙 소리가 납니다. 교수님은 내 배에 뱃살이 별로 없어서 지방이 잘 안 나왔다고 하셨어요. 근데 어떻게 이게 뱃살이 아닐 수가 있지, 어떻게 봐도 지방인데 이게 지방이 아니라면, 뱃살이 아니면 무엇일 수 있을까.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새로온 환자는 아침 수술 직전까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다가 지금은 회복 중에 있습니다. 수술 직후에는 목이 마르다고 칭얼거렸는데(수술 직후에는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남자 친구로 생각되는 남성이 말리고 엄마로 생각되는 여성이 말리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간호사실 안내 데스크 앞을 서성이는 아저씨 한 분을 봤습니다. 아저씨는 꽤 서성이다가 열린 문 안쪽을 이리저리 보더니 복도 끝으로 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서 아저씨가 다시 보였습니다. 양손 가득 커피 캐리어를 들고요. 아저씨는 커피 캐리어를 아무도 없는 안내 데스크에 올려두고 사무실을 향해, 이거 나눠 드세요~라고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간호사가 헐레벌떡 나왔지만 아저씨는 이미 저만치 가 있었습니다. 서로 감사하다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걸 보니 뭉클한 마음이 들어 나도 뭘 놓고 올 작정입니다.


4일 차

나는 오늘도 퇴원에 대한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채 병실로 올라왔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복도를 돌아다닐 정도였는데도요. 배는 여전히 아픈데 이건 며칠만에 가라앉지는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환자는 1시에 퇴원을 했습니다. 엊그제 봉지를 바스락 거리며 했던 다짐대로 퇴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다짐을 어필하기 위해 간호사가 병실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간호사가 나가면 그 자의 남자 친구와 엄마는 병실 문에서 망을 봤고 과자를 와작와작, 아이스크림을 츄룹츄룹 먹었습니다. 다시 간호사가 오면 먹던 과자를 숨기고 앓는 소리를 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퇴원을 미루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왔을 때도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하루 더 있겠다고 소리를 버럭 질렀는데 갑자기 본인도 민망했던지 웃음을 터뜨리고는 조르는 것으로 태세를 전환했습니다.결국에는 두 시간 더 있는 것으로 해서 1시에 퇴원을했습니다.


그 자가 입원해 있던 3일 동안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환자를 만나심심치 않았습니다. 배 창수가 아파 웃음을 참는데에 애를 먹었지만요.

어딘가에 또 있을 것만 같은, 원망으로 뭉쳐있는 환자들을 떠올리니 병원이라는 곳이 무심하게 느껴집니다. 그 자는 자신을, 납득가지 않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진정한 투쟁자로 자랑스러워했을까요? 무엇이 진상이고 무엇이 타당한 의문 제기인지 모호해서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많은 질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아, 나는 어쩌면 내일 퇴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일 차

배액양을 재러 온 초보 간호사 선생님의 실수 때문에 새벽 사이 정말 뜻밖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갈비뼈에 가스가 찬 것처럼 몸이 뒤틀렸는데 나중에 온 간호사 선생님 말로는 배액 주머니의 압력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어설프게 닫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크게 화를 냈고 나는 화 낼 겨를도 없이 있었는데 나중에 온 간호사와 배액 주머니를 어설프게 닫은 간호사가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 또 어설프게 닫은 간호사는 훌쩍이기까지 하고, 나도 금세 괜찮아져 성장하는 간호사의 시행착오로 여기고 사건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퇴원합니다. 배액관 뽑는 건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됩니다.

이렇게 퇴원은 환영받아 마땅한 건데 그 자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남아 있는 진통제만 다 맞으면 퇴원을 할 겁니다. 혈관통만 없었으면 쭉쭉 맞고 집에 갈텐데. 간호사 선생님은 아무래도 다 맞지 못할 것 같다며 계속 걱정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집에 가니까요.


아, 쪽지 붙인 비타민 음료 한 상자는 미리 안내 데스크 위에 몰래 두고 왔습니다. ‘오늘 퇴원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전 28화 가슴 한쪽 없는 게 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