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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Oct 03. 2022

타목시펜과 가짜 코스모스

“내일부터 정해진 시간에 매일 빼먹지 말고 드세요.“

호르몬 은폐 작전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매일 아침 먹는 알약 한 알이 암세포를 굶겨 죽일 수 있다니, 멋진 치료법 아닌가요. 내 나이 서른에 끝이 날 대장정입니다만 항암 치료를 패스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타목시펜은 내 몸을 인위적 갱년기 상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약 상자 설명서에도 부작용이 빼곡히 써 있더니 부작용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머리를 감으면 화장실 바닥에 머리카락이 이만큼, 머리를 말리면 또 이만큼 떨어집니다. 갑자기 한기를 느끼다가 또 갑자기 땀이 나고, 하하호호하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울하고 어떤 날에는 막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이관 개방증이 생겨 고막 빠득거리는 소리며 내 숨소리며 모르고 살았던 소리들이 들리고, 이전에는 없던 생리 전 증후군도 생겨, 생리 일주일 전부터는 두통에, 생리 기간에는 자궁이 빠질 것 같은 괴상망측한 통증에 시달립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감정이 복받치고 체력도 볼품 없어졌습니다.


이게 약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나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혹시 몰라 간 병원에서도 “약 때문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식의 흐지부지한 대답만 하니, 약의 부작용이겠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릴 뿐입니다.


과거 나는 엄마의 갱년기를 원망했었습니다. 엄마는 주로 화가 많이 나는 갱년기를 거치셨는데 버럭 화를 내고는 갱년기 때문이니 네가 이해해라 라고 했습니다. 나는 엄마가 갱년기를 암행어사 마패처럼 남용한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갱년기가 어찌나 싫던지, 갱년기라는 단어까지도 싫어하는 상태가 되어 나는 갱년기를 나와 엄마가 사랑하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기장에는 매일 엄마의 코스모스 이야기가 적혔습니다. ‘오늘 엄마가 코스모스 때문에 버럭 화를 냈다, 엄마가 내게 서운한 말을 했다. 근데 또 코스모스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엄마의 코스모스가 앞으로도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엄마의 코스모스를 아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나보다도 더 코스모스를 미워했을 엄마가 달리 보여 엄마에게 비비적 댔습니다.

“이게 바로 갱년기라는 건가, 가짜도 이리 힘든데 엄마는 엄청 힘들었겠다.”

오늘도 우울한 채로 일어나, 이만큼 빠진 머리카락을 봅니다. 하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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