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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Oct 05. 2022

가슴 한쪽 없는 게 뭐

“11시 55분이 막 지났습니다. 이제 올해가 5분 도 채 남지 않았는데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12월 31일은 두근거리고 떨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시대가 변한 건지, 언제부턴가는 12월 31일이 맹물 맛이 나는 날이 됐습니다. TV도 예전 같이 떠들썩한 것 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씨만 잠깐 떴다 사라지고, 보신각 종소리도 5번 정도 치고 스튜디오로 돌아옵니다. 다른 채널은 뭐하나 돌려보면 새해 인사는 진작에 끝내고 하던 일로 돌아와 춤을 추고 상을 받습니다.


2018년 12월 31일, 아빠가 퇴근길, 역사 안에서 파는 만 원짜리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사 오셨습니다. 오는 길 발걸음이 꽤나 가벼웠던지 케이크 상자를 열자, 상자 문에 기대어있던 케이크가 미끄러져 나왔습니다. 윗단이 아래로 반 내려온 초콜릿 케이크를 상자에서 꺼내 기다란 초 하나를 꽂았습니다. 그리곤 식탁 등만 켠 채 생일 축하곡에 새해 축하 가사를 붙여 노래했습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촛불 앞에서 감정이 복받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련회며 수학여행이며 종이컵 안에서 타고 있던 촛불을 보며 울었던 것을 떠올린다면, 나는 아닌데라고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화음 쌓아 올린 축하곡을 완창하고 박수까지 치자 엄마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바로 좀 전에 지나버린 아픔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가만히 누르고 있던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오려고 해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촛농을 핑계 삼아 말을 돌렸습니다.

“촛농 녹는다. 빨리 꺼야 돼.”


지난날을 떠올리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오만한 마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는가를 느낍니다.

나는 내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는 인생은 원래 마음대로 안 되는 거지만 내 인생만은 예외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떤 일을 해내면 그 성공이 마치 온전히 내 노력으로 이룬 것처럼 으쓱해졌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노력과 무관하게 갑자기 남의 인생처럼 암환자가 되어 가슴 한쪽을 잃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내려진 청천벽력 이전에도 정신 차리라는 경종은 끊임없이 울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예기치 못한 재난, 안타까운 사고. 이런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내가 이룬 것을 내 노력으로만 이루었다 으쓱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살아 있는 것도 당연히 여기지 않고요. 조급해하지도, 내 가슴을 안타깝다고 여기지도 않을 겁니다. “나는 오늘 아침 눈을 떴고 지금 촛불을 불고 있다. 근데 가슴 한쪽 없는 게 뭐.”라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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