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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Sep 19. 2020

나의 벗이여

2/2 받는 이에게

나의 벗이여.

남색 빛의 어느 날 밤 사뭇 이런 생각이 들었다네.

글이 존재하는 이유는 본래 쓰이고 읽히는 데에 있거늘 쓰이기만 하는 내 글은 쳐다봐주는 눈이 하나이니 그 처지가 전화번호를 휘갈겨 적은 한낱 메모 만도 못하다는 그런 생각 말일세. 처연한 내 글의 처지와 마음이 동하여, 훗날의 겸연쩍음은 생각 않고 첫 줄에서 자네를 불렀네.


고백건대 나는 지금도 종종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꼿꼿이 앉아 있는 것뿐이었던 날들을 떠올린다네. 창문 타고 흘러들어온 햇빛이 노을로, 노을이 가로등 불빛으로 바뀌던 순간을. 방구석의 명암 짙은 모서리들을. 얕은 숨을 나눠 쉬고 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약한 밤들을 떠올린다네. 나약한 밤들 이후로 부모님과 나는,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하는 편일세. 그럴 때면 매번, 이변과 이별의 야속함에 대해 생각하지. 부모님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앞서갔던 세 번의 날에는,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심연에 빠져있었다네. 날카로운 가설 사이에 나를 자꾸만 파묻었단 말일세. 책상에 이불을 쌓아놓고 고개만을 뉘어 잠을 자던 밤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하고 가로등에 비춰 생긴 창문 그림자 서린 벽을 보면서 내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 아무것도 없었던 거구나 생각했지. 수많은 요소들의 맞물림 가운데, 나라는 행위자가 있었을 뿐이었던 거야.


내일 말고, 이따 가도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세. 그리하여 적당한 슬픔과 적당한 행복을 만나세. 이것이 내가 오늘 나의 가장 사랑하는 벗인 자네에게 미흡한 글로써나마 전하고자 한 것이라네.

자네가 어느새 내게 큰 존재로 자리 잡은듯싶어 때로는 얼떨떨하다네.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는 벗이 내게는 흔치 않아, 자네는 나를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네만 외길이라 해도 나의 마음이 그런 것은 기실일세.


오색찬란한 기분은 상념 사이를 비집고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반면 무채색의 기분은, 금방 식도로 술술 넘긴 침과 같이 제한이 없어 상념을 집어삼키기도 하잖나. 혼자만의 상념은 넝쿨 같은 존재라 깊어질수록 기세가 가없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네. 외길이어도 괜찮다 하는 벗이 있으니 오색찬란함이든 무채색이든 함께 나누고 털어버리세. 아무쪼록 쉽게 읽혔길 바라네. 건강 조심하시게.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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