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조금 다른 감상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대처 수상 시절 영국 북부 지역에서 탄광 폐쇄조치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을 배경으로 한다
일반적으로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꿈을 향해 나가는 타이틀롤 '빌리'가 가장 주목을 받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예전부터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함께 하는 Solidarity 였다. 성인들과 아이들의 삶을 자연스레 한 공간에 병치시키면서, 경찰과 노동자간의 대립 속에서도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대상(요즘 말로 을과 을의 싸움을 벌이는)임을 보여주는 등, 창의적인 안무와 배치로 무대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주제의식이 잘 살아있기 때문인다.(현재 내가 경험한 모든 뮤지컬 안무 중 최고로 생각한다 )
또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완전 다른 세상 이야기인 발레에 빠진 빌리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여 조롱하고 윽박지르다가도, 후반부에는 그의 재능을 깨닫고 없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차비를 제공하는 모습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펑펑 울며 관람했던 10주년 라이브 DVD 후기에도 썼지만, 각각의 우선순위를 따랐기에 벌어지는 가족간의 갈등, 아버지로서 안타까운 희생의 모습 (He Could be a star) 역시 심금을 울렸던 작품이다.
그런데 2018년 1월, 네번째로 관람한 빌리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Angry Dance에서 현실의 벽과 절망에 부딪힌 강력한 절망을 보여주고, Dream Ballet에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Electricity에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보여주는 빌리는 여전히 멋지지만...
이전보다 더욱 빌리와 함께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삶이, 내가 경험한 혹은 빠져있는 주제와 연결되어 지금의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주제들은,
- 일의 의미가 변화한다면 연대는 어떻게 달라질가
- 지는 싸움의 의미와 방법
- 다른 선택을 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포용할까.
- 빌리가 아닌 마을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다.
처음에 쓴 것처럼 '빌리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민영화 정책에 반대하여 벌인 파업을 배경으로 한다.
대파업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였으되 '이해관계자를 깊이 고려하지 않은 방법'으로 진행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기에 탄광노동자들은 기존의 지역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공통의 적인 '대처 정부'를 향해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해서 보장해 달라고 연합해서 투쟁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그런데 과거 산업의 변화가 신자유주의/주주자본주의에 기반한 민영화의 방법 등으로 일어났다면,
향후의 변화는 인공지능(최근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밀려 관심이 좀 낮아졌지만)에 기반한 자동화가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자리의 변화방향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직 모르고, 탁월한 역량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회를 얻을 수 있겠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아직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하겠다.(작년 트레바리를 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앞으로 적당히 살기는 참 힘들겠다'였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과거처럼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의 가능성이 높을까?
지역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에게 명백한 적(이윤효율화가 우선인 정부의 정책담당자 및 민영회사. 한국의 경우 원청과 하청에 이슈도 포함될 듯 하나...)이 있을 때(?)에 비해 뚜렷하게 투쟁할 대상이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며 외부세력(?)의 격려와 지지를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을까.
얼마전 카풀 토론회를 무산시킨 택시운송조합이나 온라인 중고차거래를 불법으로 규정한 기존 중고차업체의 모습을 비판하고 지금도 적절한 대응이라 생각하지는 않으니, 빌리를 보면서 그 분들의 마음과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변화의 방향은 분명히 있고 일정부분 사회적 합의가 되었을지라도, 자신들이 했던 일과 삶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함께 들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직업/일자리는 사명의식과 밥벌이와 부조리한 관행이 함께 뒤섞여 있다.
어짜피 세상에 100% 완벽하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구조도 없고, 수혜자와 피해자도 일정 부분 생길 수 밖에 없다. 변화 가운데 부작용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부작용을 아주 없애기 위해서는 지금의 구조가 모순되고 문제가 발생함에도 그대로 지켜나가는 수 밖에 없음에, 변화에 따른 혼란이 있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희생을 전적으로 특정개인이 지라고 할 수는 없다. 일정부분 변화의 연착륙이 필요하고, 직접적인 당사자들에 대한 인격적 존중은 필요하다. 과정이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누군가에게 기존의 익숙했던 기회는 사라질지라도 새로운 기회는 쉽게 얻을 수 있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경제적/정서적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부재라고까지 쓰지는 않겠다)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철저한 '악의 무리'로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80년대 더럼(Durham)에서 일어난 저항은 숭고해 보이기는 하나,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그 형식의 대응이 효율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들의 마음과 가치는 잊지 않되, 변화에 필요성과 당위성은 함께 나누고, 더 넓은 차원의 연대와 협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윌킨슨 선생이 아버지가 다툴 때 던진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복지센터의 도움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당신들은, '지는 것이 뻔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렇다. 이미 결과는 정해진 싸움일지 모른다. 런던 시티에 증권가나 컨설팅사 입장에서 보기에는 정말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이미 정부는 어떠한 저항에도 강경대응을 하기로 방향을 정했고 준비도 되었기에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민이 들었다. '지는 싸움 혹은 질 확률이 뻔한 싸움'에도 참여해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아직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있는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선배(!!)는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는 질문 혹은 울분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 마음이 아파서' 라고.
때로는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이러면 안 된다고 느낀다면, 마음을 건드린다면 동참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는 '1987'의 싸움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싸움이고 '노동자들의 파업'은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정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항하지 않으면 곧 현실이 될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지켜지기 위해서라는 점에는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개인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는, 혹은 당장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을 때는, 지는 싸움에서 빠져나가서 이기는 편에 빨리 서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때로는 지는 싸움에 동참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함께 만들어간 시간이 중요하다면, 지켜야 할 동료나 가치가 분명히 있다면 그 싸움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과거만 추억하며 사로잡혀 살아가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과거와 삶이 완전히 무시되어서도 안 될테니.
그것을 허용한다면 미래도 없어질지 모르니.
그렇다면 비록 목적이 비록 그게 아니더라도,
지는 싸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방법에 대한 더 많은 논의/합의가 있기를 바란다.
지더라도 싸웠기에 얻게 된 희생의 대가가, 뒤에 빠져있던 사람에게만 돌아가지 않도록 말이다.
더 많은 양심에 따른 선택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만들기 위하여, 세상의 자비가 더해지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소.
나에게 주어진 길을 따를 뿐...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 길로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저 별을 향하여
(Man of La Mancha, Impossible Dream 중)
먼저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민영화된 탄광(으로 추정된다)으로 출근한 동료는 지역 커뮤니티에서 완전히 배제당한다. 하지만 후반후 빌리가 로얄발레스쿨 오디션에 참여할 비용이 턱없이 부족할 때, 배신자라고 낙인찍였던 그가 많은 돈을 기부함으로서 빌리는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를 얻는다.
빌리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들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결국 암울한 현실에서 해결은 돈을 가진 사람이 하는구나 생각에 서글퍼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연대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한다.
물론 파업을 지속했던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킬 것은 놓지 않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 최근 정체성과 가치관을 내세우며 이합집산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판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슈가 있는 기업의 사회공헌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느냐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각자 다른 가치관에 맞게 선택을 하되, 그 선택의 과정에는 치열한 논의도 있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도 온전히 지도록 것이 좋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아버지와 형이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결국 그 상황에 맞는 타협점을 찾았던 말이다.
SNS가 건강에 안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은 구질구질해 보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은 화려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링크한 기사처럼 그것은 대부분 허상. 주변사람들 역시, 일상에서 빛과 어두움을 함께 경험한다.
극의 후반부 빌리가 로얄발레스쿨 합격소식을 받은 바로 그 때, 광부들의 파업은 실패로 끝이 난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기에 미묘한 감정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폐쇄왜 매각과 실업으로 이어질 그들의 운명을 직감하며 마을 사람들은 힘들어(빌리처럼 발레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이기에)하지만, 할머니와 복싱 관장님은 빌리를 칭찬하며 앞날을 격렬해준다.
그리고 빌리가 런던으로 떠나는 바로 그 순간,
광부들은 이제 훨씬 열악해질, 그들의 현실처럼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을 갱도 속으로 성과없이 다시 돌아간다.
And in the ground we maybe lain
But a seed is sown to rise again...
We fought for all the things we saw
The battle's lost but not the war....
We walk proudly, and we walk strong
All together we will go as one
The ground is empty, and cold as hell
But we all go together when we go
많은 사람들은 빌리를 해피엔딩으로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탄광에 들어가는 Once We were Kings 장면은 가사를 정확히 듣지 않으면 얼마나 멋지고 승리의 감격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가.)
빌리가 훌륭하게 성장하는 시간동안, 찰리가 예언한 대로 그 지역의 경제는 파탄이 나고,
윌킨슨 부인은 시간이 지나 빌리에게서 완전히 잊혀질지도 모른다.
이렇듯 세상이 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명과 암은 계속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쪽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빌리의 가슴이 뛰는 것은 좋지만,빌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최선의 삶을 살았지만 승리하지 못한 많은 마을 사람들도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물론 광부들의 삶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물로만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한,'그냥 아무나 되'도 어쩌면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시에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도 계속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빌리처럼 '자기 표현으로 가득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고 나이 80부터도 꿈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빌리처럼 강한 의지와 깊이를가지고 살아갈 자신은 없다(지금까지의 행적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선천적 재능에 대한 무력감도 느끼는 중이기에.)
하지만, 함께 빌리를 키워낸 더럼(Durham)의 마을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내가 가치를 두는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때로는 갈등을 겪더라도 계속 연대하며,
상황판단력을 가지되 때로 필요하다면 지는 싸움에도 참여하였으면 좋겠다.
그러며 함께 내 주변의 빌리(난민을 돕는 공익법센터 어필의 변호사인 친구 이일, 뮤지컬배우로 계속 성장하고 있는 박은태 가 우선 생각난다)를 응원하고 격려하여, '주어진 운명에 맞서 싸워서 저항할 수 있고, 스스로거 어디로부터 왔는지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누는데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조직,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화하는 조직을 만들려는 나의 꿈과도 이어질 수 있다고 믿으며)
2018년 1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들었던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