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1번을 찾아내고 지켜낸 사람, 스토너
삶에서 무엇을 1번으로 둘지 정하는 게 인생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경험과 사건에 의해 1번 이후의 순서는 바뀔 수 있다. 하지만 1번만은 지킨다면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1번은 자아 정체성. 사춘기 이후로 지금껏 난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도전이라면 기꺼이 뛰어들었다. 끔찍한 좌절이나 고통을 겪어도 오히려 지독하게 직면해서 자신을 흔들었다. 그렇게 기초 공사 하듯 단단하게 만들었다.
영문학 교육자인 주인공 스토너도 필자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1번만 지킬 수 있다면 다 괜찮다고 여기고, 1번을 위한 선택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사람 말이다. 전체 맥락을 보면 그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1번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지켜내지도 않으며 그냥저냥 남들이랑 비슷하게 사는 인생보다는 훨씬 낫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난 한 번도 스토너가 안쓰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스토너는 대학에 가게 되면서, 문학을 만난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농과대로 입학했었지만, 아처 슬론의 영문학 개론 강의를 들은 후 새로운 세계에 과감히 발을 들여놓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과 자극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은 그에게 생전 처음 느끼는 고민과 고뇌를 안겨주었다.” (18쪽)
“그는 아처 슬론이 수업시간에 한 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말 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19쪽)
자신이 무엇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다가오곤 한다. 스토너는 그 순간을 잡아냈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눈이 빨갛게 충혈될 정도로 작품을 읽고 1년 만에 간단한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을 정도였다. 그렇게 스토너는 대학 4년이 흐른 후, 아처 슬론 교수가 권한 교육자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뜻밖에 인생의 중요한 시점은 느닷없이 다가오고, 직감적으로 훅하고 선택해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는 문법과 작문 기초를 가르치지 시작하며 문학과 언어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 간다.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간단한 작문 연습에서 아름다운 산문의 싹을 보았으며, 자신이 느낀 것들로 학생들에게 활기와 의욕을 불어 넣게 될 때를 고대했다.” (40쪽)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 씨름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41쪽)
그는 단 두 명의 친구밖에 없었다. 친구가 두 명뿐이라서 불행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의 1번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정감이 아니었으니 사람들과의 교류에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았다. 사랑에는 달랐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이디스에 반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급하고 서툰 청춘의 실수였다. 딸 그레이스가 세상에 태어난 후에도 행복한 가정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1번은 자기 자신이었기에 다른 것들이 무너져도 꿋꿋이 견뎌 나갔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실세와 절대 타협하지 않았고, 성공과 명예보다는 학자로서의 삶을 우선시했다. 심지어 캐서린과의 사랑에서도 그랬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래서 빚과 궁핍이 정기적으로 거듭 압박을 가하는데도 그는 몇 년 동안 행복했다. 젊은 대학원 시절과 신혼 시절에 꿈꿨던 삶과 거의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143쪽)
이 소설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도 반전도 없다. 하지만 묘하게 책을 놓게 되진 않았다. 마치 주인공의 삶처럼 진득하게 그의 삶을 따라가 보았다. 마지막 책장까지 다 덮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필자의 아버지는 소설의 내용을 듣더니, “원래 인생이 대단하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고,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거 아니겠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게, 인생 별거 있나. 세상에 손 꼽는 대단한 사람은 몇명 밖에 없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삶들을 살아가는 거지. 스토너의 삶은 특별하진 않지만, 적어도 1번을 찾아냈고 1번을 지킨 점에서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스토너처럼 1번은 지켜내는 삶을 만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