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툐툐 Mar 06. 2017

머리와 가슴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을까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서 <소년이 온다>를 다 읽었다. 음.. 감상을 뭐라고 남겨둬야 할 지 모르겠다. '감히 무엇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쉽게 겪기 힘든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느낌이다. 분명 현실 이야기인데 나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조금은 절절하게 공감하고 아파해야만 하는 건가' 하는 마음이 의무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이런 걸 보면 내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면서도, 냉철하고 이기적인 성향도 있긴 게 맞긴 한가 보다.


그래도 이해해보고 싶었고, 노력해보았다. <채식주의자>를 통해서 우울해서 더 우울한 걸 흡수해봤는데, 우울의 출렁임은 없어지고 편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을 쓴 작가가 낳은 다른 이야기도 성실하게 흡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출현한 한강 작가님의 방송을 들었다.

저자는 <희랍어 시간>이라는 소설에 이어, '눈부신'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잘 안 되었고, 왜 자신은 눈부신 이야기를 쉽게 쓰지 못하는지 곱씹다가 어린 시절까지 떠올렸다. 그러면서 광주 이야기를 쓰게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의식을 많이 반영하고자 했지만, 광주민주항쟁을 추모하는 묘에 직접 다녀간 후에 소설 구성을 바꾸었다.

"그 일을 소설로 쓸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지냈어요. 언젠가 나는 이 소설을 쓸거란 각오가 사실은 없었어요. 저는 내면에 더 관심이 많은 성향의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선배 작가들이 너무 훌륭하게 작업을 해두셨기 때문에, '난 안 해도 될 거다'라는 마음으로 지내왔는데요. 아까 그나마 밝았다고 해주신 <희랍어 시간>을 쓰고 나서, 거기서 더 나아가서 빛이 많은 눈부신 것을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됐고, 왜 안 되는 가를 스스로 더듬어 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인간을 껴안는 게 어렵고, 인간으로 이뤄진 세계를 긍정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가, 그게 왜 저에게는 고통인가를 내적으로 물으면서 안으로 들어가다가, 80년 5월 광주를 다시 발견하게 된 거죠(한강 작가님은 광주 출생). 원래는 그 얘기만 쓰려고 했던 게 아니고요. 제 색깔의 소설, 현재가 있고, 광주를 겪은 사람이 있고, 그들이 서로 마주 보는 것을 구상했었어요. (이동진의 빨간책방 84회 중)"

저가가 이 소설을 왜 썼는지는 깊이 공감했다. 나도 내면에 관심이 더 많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리는 것을 반복하며, 표현 욕구가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미 밝혔듯이 아무리 노력해봐도 여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을 공감하려면, 아주 조금이라도 나와 관련이 있어야만 가슴이 움직이는 사람인가보다.


그리고 사실 이상한 꿈을 꿨어

이 소설을 읽던 중이던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꿈을 꿨다. 이 꿈이 이 소설을 받아들이던 내 무의식과연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꿈이겠지만 기분 나쁜 꿈은 아니고, 조금 이상하지만 해석하기 나름인 꿈인 것 같아.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이번 꿈은 잠에서 깬 후에도 연하게 계속 남아있다.

무언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푸른 잔디밭에 푸른 하늘이 보였던 것 같다. 어둡지 않고 해가 있는 낮이었다. 바람도 살랑거리며 조금 불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있었고, 내 곁에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집으로 장면이 바뀌었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가방에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어떤 건 넣었다가 다시 빼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넣었고 버렸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꿈을 꾼 다음 날인 일요일에 방송을 들었었다. 한강 작가님은 꿈을 자주 꾸고, 꿈속 이야기를 작품으로도 많이 쓴다고 한다. 그리고,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엮을 때가 바로 <소년이 온다>를 쓰고 있던 시기라고 한다. 또한, 앞으로는 더 눈부신 작품을 쓰고 싶다고도 밝혔다. 작품 중에 가장 빛이 나는 편이라던 <희랍어 시간>도 읽어봐야겠다.


그 와중에 스며든 문장들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종일 앉아서 하는 근무가 끝난 뒤, 다섯 정거장 거리의 집까지 서두르지 않고 걷는 시간을 그녀는 좋아했다. 걷는 동안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녀는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124p.

-이런 순간엔 자신의 일부를 잠시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여러번 접어 해진 자국을 따라 손쉽게 접히는 종이처럼 의식의 한 부분이 그녀로부터 떨어져나간다. 127p.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 161p.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61p.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62p.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225p.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323p.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