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툐툐 Mar 02. 2017

우울한데 더 우울한 게 끌릴 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우울의 기운이 종종 나를 덮친다. 우울증과 우울한 기분이 헷갈릴 정도로 자주 그렇다. 감정의 온도가 착 가라앉을 때면, 줄곧 해왔던 방식으로 나를 다독인다. 나를 편하게 만드는 목소리와 멜로디 듣기, 구원의 문장을 찾아 책 읽기, 그 문장들을 타이핑하거나 친필로 적기, 달달한 초코케익이나 치즈케익 먹기, 아메리카노 마시기,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 보기, 일기 쓰기 등.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너무 무겁고 비생산적인 감정은 나누고 싶지 않아서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편이다. 억지로 긍정적이고 플러스로 끌어 올리려 애쓰지는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비우고, 깔깔거리고 웃고 싶을 때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멜로 드라마와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더 밑으로 지하까지 내려가 보고 싶었나보다. 기분이 너무 울적했고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리디북스 웹사이트로 들어가서 위시리스트를 뒤적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끌렸다. 매우 음침하고 파격적이라고 들었던 소설. 그리고, 다음 대사를 읽고서,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277P)


영혜는 어느 날 어떤 꿈을 꾸었고, 고기를 먹지 않게 된다. 채식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이 1년간 채식을 했으나, 사람들의 시선과 한국 사회 구조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서 포기했다는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래서인지 채식하는 사람의 심리와 실상이 궁금했던 차였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영혜가 채식을 선택한 이유는 과거 트라우마 때문이었고, 내가 가졌던 호기심을 풀 수 없겠다는 것도 알게 됐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총 세 편의 작품으로 엮여져 있다. 작품 리뷰나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기에, 본 작품이 2016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알고 보니, 이 세 편은 이어지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다른 내용의 단편소설인 줄 알았던 나는, 첫 번째 이야기인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서 한 템포 쉬어갔다. 깊은 여운을 충분히 음미하고서,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책 뒤 편에 실린 해설을 먼저 읽어보고 리뷰도 몇 편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러자, 여러 물음표가 둥둥 떠올랐다.


도대체 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뜻밖의 충격에 멀쩡한 사람이 있는가. 어떠한 이름으로 정의하려는 병에 걸린 걸까. 결과에만 기겁하고 달달 볶기 전에, 근본적인 원인과 속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건가.


등장인물 중에서 정상인은 거의 없다. 다들 조금씩 병들고 미쳤다. 포털 사이트의 어떤 유저는 이 소설은 '정신병자 이야기'라고 단정 짓던데, 그것도 아예 틀린 표현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내린 정상인의 기준은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 머나먼 과거의 정신분석학 전문의도 조금씩 문제가 있는 게 정상인이라고, 정상인이 정상인이 아니여~, 라고 말했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가 이상 증세를 보이자 도망가버린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끈끈한 관계여야, 가까운 지인이 미쳐버려도 떠나지 않을 수 있을는지. 난 도무지 상상조차 어려운 영역이다. 누구나 정상인 '척'일지 언정, 돌아버리고 싶지는 않을 테지.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한데, 옆에서 한숨 푹푹 쉬면 짜증 나는 그런 기분이려나. 과연 나라고 해서 영혜 남편처럼 영혜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보호해줄 수 있을지.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 (37P)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313P)


'최소한 혈육은 달라야지'라는 말도 억지다. 혈육이니까 '당연히' 온 마음과 몸을 바치라는 법은 없다. 최근에 '당연하다'는 말의 폭력성을 새삼 깨달았다.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 내가 '당연히' 스케줄을 다 알려줘야지, 라는 말에 시선을 떨구었던 때가 생각났다. 당시엔 그게 뭐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건가 싶었는데. 반대로, 상대방이 '당연히'라는 부사를 강조하며 무언가를 들이댈 때의 불편함을 겪으니, 그제야 그가 어떤 지점에서 무너졌을지 공감하게 됐다. 나도 모르게 혀로 폭력을 휘둘렀었구나.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94P)


너무 힘들고 위태로워서, 심각한 고민은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싫을 때가 있다. 혼자 삼켜서 견딘 다음에, 나중에 덜 무거워진 - 상대방도 감당할 만하겠다 싶어졌을 때- 그것을 지인과 아주 조금 나누곤 한다. 영혜도 이런 심리로 차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혜를 욕망과 예술의 대상으로 갈구하던 남자만 '왜' 고기를 먹지 않냐고 묻는다. 다들 고기를 먹지 않는 모습에 답답해하며, 먹이려 들기만 하는데 말이지.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히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182P)


"아무도 날 이해못해......의사도, 간호사고, 다 똑같아......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293P)


돌아버리기 직전의 똥 덩어리를 배출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싸고 치우는 게 나을까. 정답은 없는 현실을 알아도, 이렇게 또 자문해본다. 확실한 건, 전혀 깊지 않은 공감대로 '잘 될 거야', '원래 다 그런 거야', '다 힘들어' 따위의 막연한 긍정주의를 무방비하게 강요받느니, 나 혼자 조용히 있는게 더 낫다. 조금 어둡고 심각하더라도, 찬찬히 진심으로 스며드는 편이 낫다. 난 링거나 약 같은 임시방편이 필요한 게 아니라,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고 싶다.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소설은 의식의 퓨즈가 서서히 끊어지는 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읽힐 수도 있지만, 의식의 퓨즈를 끊고 싶어도 이을 수밖에 없었던 이를 중심으로 지체된다고 읽힐 수도 있다."(348P)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을 보고 가졌던 소설에 관한 선입견이 깨졌다. 무언가를 명사로 모두 설명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데. 최근 진로를 고민하면서 원하는 직무를 명사로 정의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세상엔 수많은 일거리가 있고, 과거엔 없던 직업이 생길 거라는 상식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이제 마냥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찌든 때가 꽤 꼈나 보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노련해진 점들도 많아졌지만 그 동시에 이전보다 더 불안해하고 몸을 사리게 됐다. 아무것도 몰라서 무식하게 부딪히고, 열정적이었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이게 과연 노련함일까, 비겁한 어른이 되어, 보수적인 어르신으로 늙어가는 걸까.


소설을 읽다가, 안 그래도 우울한데 더 침울함 속으로 빠지게 하는 위험한 선택을 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점점 내 안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해가 지자 비가 왔던 탓도 있고, 비록 내 맘에 햇살이 쨍쨍 쏟아지진 않았지만, 출렁이는 파도와 어둠과 안개는 사그라들었다.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는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126P)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260P)


내가 종종 울적한 기분에 휩싸이다가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구나, 미쳐버리진 않았구나, 하는 결론이 난다. 우습게도. 우울 회오리 속에서는 감정과 생각이 최악으로 치달았는데도 말이다. <채식주의자> 같은 극단적인 자기 파괴자와 그의 곁에서 고통받는 인물들을 보면, 내가 마주했던 것들이 끔찍한 최악은 아니구나 싶다. 아무리 본인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라고 할지언정.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동질감을 느끼면서 위로받았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304P)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상처가 뚫려 있다고 느꼈다. 마치 몸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여서,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을 그녀는 묵묵히 바라보았다."(306P)


"캄캄한 구멍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빨아들이려 하는 것을 느꼈다."(306P)


이 소설은 파격적이고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들이대는 상식, 도덕, 기준에 어긋나는 점 투성이니까. 성한 사람을 찾기 힘드니까. 그런데도 나는 이 소설이 읽혔다. 읽히는 건 읽고 읽히지 않는 건 안 읽는 내가 이 소설을 읽어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을 다 읽고 바로 영화도 보았을 정도로 이상하게도, 내게 훅 하고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다.


해피엔딩에 익숙한 대중문화의 노예여서일까. 나도 결국 나약하여 환각제 같은 행복과 긍정의 힘이 필요해서일까. 그토록 괴롭고 힘들었고, 그다음에 어떻게 이겨내면 좋을지 아주 조금의 실마리는 주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자, 원래 인생은 다들 이렇게 X 같아, 라고 끝내버리는 건가.


작가 한강은 인터뷰에서 "제가 섣불리 화해하거나 치유하는 건 잘 못 해요. 화해하지도 않고, 치유하지도 않고. 제가 믿을 수 있는 만큼만, 걸음이 느리더라도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만큼만, 그만큼만 나아가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 중)"라고 밝혔다.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어봤어요. 의외로 거기엔 답은 없고 질문들만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저자들 역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로서 제가 던지는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들을 기록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고, 질문을 던지고 답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나도 질문을 던지는 방법으로 글을 쓰고 싶었어요(온북TV 인터뷰 중)"라고도 말했다.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소설에서 답을 내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흔한 열린 결말을, 이번에는 그런 결말이지 않기를 내심 바랐었나보다. 결국 자신의 해답은 스스로 찾는 걸로. 역시나 이번에도 답은 못 찾았지만, 진득하게 짚고 나가는 이런 과정 자체가 내게는 또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머리와 가슴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을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