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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의 감촉 Oct 22. 2023

코로나보다 무서운 예방접종

아들 예방접종


4월 8일 엄마잔혹사


scene #1 


내가 태어나 가장 스트레스 받는 날이 삼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수요일은 아이들의 유치원 소풍날이다. 내가 소풍날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바로 “도시락”을 싸야하기 때문이다. 둘둘 만 김밥이면 행복하던 시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친구들 도시락과 내 도시락을 번갈아 볼 녀석들. 그때 내 새끼들이 상상이상으로 감동하도록 최대한 귀여운 도시락을 만들어야 한다. 요리엔 한줌의 취미도 없는 내게 도시락 싸기는 그냐말로 곤욕 그 자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유행하는 도시락은 무엇인지(달팽이 김밥이란다.) 검색하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고 머릿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scene #2 


아까부터 무엇을 하는지 꼬물거리던 아들이 ㅎㅎ거리며 조그만 종이를 테이프로 이어만든 미니책을 가져와 내민다. 제목이 <엄마책> 이란다. 


“우와아~ 저엉말?!” 


“응. 엄마 선물이야.”


감격 속에 받아든 나.


그런데.....


scene #3


무려 [엄마책] 속의 엄마는 눈꼬리가 올라가고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를 지르는 괴물이었다. 그나마 ‘귀여워’ 소리가 나오는 건 택배박스를 열었을 때 거기서 나오는 무언가에게 감탄하는 것이고, 결론은 엄청 큰 글씨의 “야”소리가 등장하고 아들은 두 팔을 올리고 도망간다. 그리고는 유치원 버스를 타고 도망치듯 유치원으로 간다.


scene #4


아들 마음 속 엄마의 이미지에 기겁한 엄마.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생각한다. 내가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았을까. 마음대로 살 것을... 하필이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참고 애쓰며 해왔던 그 일을 아이들을 위해 이를 악 물고 또다시 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아들의 눈으로 마주한 내 모습이 괴물이라니..현실은 더더욱 비극이 되었다. 


scene #5


새로운 협박과 윽박지름이 시작된다. 엄마는 이제부터 엄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겠다. 널 뱃속에 품었을 때부터 무지막지한 고생과 낳고나서 잠못자고 젖물리고, 똥도 못누고 샤워도 못하고 나 다니고싶은 회사도 못가며 왜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며칠 후부터 회사로 갈테니 너는 하비와 유치원 등하원을 해라. 엄마랑 지내는 며칠간만 참으라.


scene #6


울고불고 매달리는 아들을 제쳐두고 부엌에 간 내게 온갖 충동들이 지나간다. 칼을 보고 바깥도 보고 술도 마시고싶고 혹은 현관문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온갖 충동질과 전쟁을 벌이던 그때 다행히 남편이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scene #7


아들은 내 눈치를 보고 나는 오열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들이 때때로 아빠를 거부할 때 삐치면 그때마다 내가 아이들이 어리니 이해하라고 했다며 나에게 그 말을 돌려준다. 


scene #8


“이리와서 앉아봐. 나단이는 잘못한 것 없어. 아빠 엄마가 나단이 한나 사랑해서 다 한거지. 너희들에게 뭘 기대하고 뭘 잘하라고 한 것 아니야. 너희들은 잘못한 것 없어. 나단이가 그림을 아주 잘 그려줬어. 엄마가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게 해줬어. 미리 예방주사 놔줘서 고마워.”


박총 목사님이 주경 목사님 결혼식장에서 결혼은 도박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한 인생을 건다는 것에서.. 오늘 느꼈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내 인생을 판돈으로 거는 순간 말이다. 


내 인생을 판 돈으로 걸고 벌이는 도박.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현실-경력단절, 초경쟁, 사회적 안전망 제로-에서 어느 부모든 자신의


삶을 자녀를 위해 저당잡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이든 걸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너희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했다라고 여기는 순간. 자식농사는 농사가 아닌 도박판으로 바뀐다.


정확히 알았다. 아이들은 배신할 것이다. 그것이 부모된 마음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얼마나 애지중지, 금지옥엽이었는데.. 


이 판이 시작되었을 때 그냥 배반 따위는 당연하게 깔고 시작해야했다. 아이들은 모른다. 당연하다. 중요한 건 이것이 내 선택이었고 내 결정이었고, 참혹한 결과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그렇다. 나는 희생했으니 이 정도면 된 것 아니냐. 나 다니고 싶은 회사 포기했고, 나 하고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그리고 이젠 건강까지 놓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는 나의 태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교만함. 아이는 그것을 못읽었을리가 없다. 어른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기민한 아이들이다.


무엇을 해도 부족할 것이다. 맞다. 어떻게 해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건 책임지는 자세였다. 그래 희생했으니까 나 좀 냅둬. 그건 아니었다. 내가 선택했다. 너희들과 함께하기로.. 그건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엄마로서 부족한 결과까지 껴안는 책임을 하겠다. 아들 그림을 보고 또 보고 쥐고 또 쥐며 다짐해본다.


애도한다. 가지못한 길에 대한 애끓음을 부여잡고 지금의 선택을 헤집어놓고 그러면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리고 혹시나있을 나쁜 결과들에 대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나의 어리석음을 마주한다. 


이래서 누군가가 자식을 손님처럼 키워야한다고 했나보다. 길게 머물고 가는 귀한 손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 나를 투여하고 나를 투사하고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의미를 주사기에 약을 넣어 밀어넣듯 그렇게 하기를 해왔다는 것. 그러면 이 판은 도박판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다시금 명심해본다.


엄마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나는 누구일지..


길고 긴 생각들 속에 첫발을 들여놓는다.


예방주사 놔준 아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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