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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의 감촉 Oct 22. 2023

언니

세계의 평화 No 거대한 질서 No

앉아 있는 모두가 공감의 심연 속에 잠긴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를 포기한 휴대용 화장지가 여기저기를 휘돌아 간다. 물티슈도 손에 손을 넘어 공중을 다닌다. 휴지를 뽑는 소리는 선명하다. 


그보다 내 귀에 잘 들린 건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다. 울음을 목 안으로 삼키는 소리. 고개를 숙이거나 끄덕임. 누군가를 눈으로 안아준다. 앉아 있는 모두가 공감의 심연 속에 잠긴다.


엄마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 모이자. 장하나 전 국회의원은 한겨레 토요판에 칼럼을 연재했다. 칼럼을 본 엄마들이 주섬주섬 발걸음을 옮겨 오늘에 다다랐다.


울며 불고 또 울며 불며 말하던 우리는 모여 어느새 정치하는엄마들이 되었다. 흔히들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라고 하면 멋지다고 반응한다. 멋지다는 반응에 겉으로 멋쩍게 웃고 속으로는 서늘하다. '당신이 하니 나는 응원할게. 하지만 나는...' 혹은 '당신은 그러던가.' 때론 '당신은 어리석다.'로 들리기도 한다.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정치하는엄마들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이제 그 마음은 활동 후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절망, 능력이 이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절망. 겪어도 되지 않았을 절망을 겪었지만 난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반감되고 또 반감되고 반감되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활동가다. 이유는 언니.


언니는 동성의 손위 형제를 가리키는 조선시대 용어. 정치하는엄마들에서는 연령,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를 언니라고 부른다. 언니들은 그래서 엄마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빠, 삼촌, 할아버지, 이모, 삼촌, 그리고 어린이 스스로도 존칭 하여 언니이다. 


유치원 3 법, 어린이집 급간식비 인상, 어린이생명안전법, 그리고 스쿨미투, 탈석탄법 등 수많은 시간들을 보내온 언니들. 우리들 중 몇 명은 밤을 새웠고, 몇 명은 모든 국회의원실 문을 두드렸고, 또 아픈 이들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그런 언니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내가 지금 이 활동에서 손을 놓으면 어제도 먼 지역에 다녀왔을 언니가 밤을 새워야 하고, 아픈 아이를 두고 동동거리는 언니를 위로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한 외침도 좋지만 그보다 나는 언니들이 좋다.


BTS가 그래미를 받니 안 받니 할 때였다. ARMY인 나는 열이 뻗쳤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에 이런 가사와 함께 돌아왔다. 


다 말하지, 너무 작던 내가 영웅이 된 거라고 (oh, no)

난 말하지, 운명 따윈 처음부터 내 게 아니었다고 (oh, no)

세계의 평화 (no way)

거대한 질서 (no way)

그저 널 지킬 거야 난 (boy with love)


그래. 그래서 나는 오늘도 ...는.엄..들이다.


정치하는엄마들(Political Mamas)은 대한민국에서 엄마로서 겪는 사회적 불합리와 구조적 모순을 개선하고자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이 2017년 6월 11일 창립을 선언한 비영리민간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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