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타로카드 에세이
0번 카드이자 일명 '바보 카드'는 타로카드 메이저 아르카나의 시작과 끝을 잇는다. 마치 영화 <트라이앵글> 에서 시간에 갇혀 계속해서 낯선 배에 몸을 싣는 여인 같다. 또한 타로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수학의 정석>이 우리를 집합 전문가로 만드는 것처럼, 다른 카드는 몰라도 이 바보 카드에 대해서는 한두 마디씩 거들고 싶어진다. 한편 리딩 중에 바보 카드를 만나면 먼 산을 잠시 쳐다보곤 한다.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차 있는, 영원으로 통하는 길에 개입되어 있을 것으로 의심이 되는 키워드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가' 잃었는가? 그렇다면 그는 잃을 게 아직 남은 사람이다. '있다'라는 존재, 아이엠(I am) 이라는 나 자신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잃을 거 없는 사람이야!' 하고 나서는 이의 만용은 처절하지만 어리석다. 반면에 텅 빈 사람, 비어 있으므로 모든 것을 거울처럼 비추고 채우는 사람은 어떤가. 0과 제로(Zero), 무(無)는 정적인 상태로 멈춰 있거나 그 무엇도 침투하지 못하는 성역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0 다음에 오는 모든 숫자를 담을 수도 있고, 이미 담고 있을 수 있으며, 그 무엇도 담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이 아니라 '현상'이다. 이 분위기/ 몸짓/ 에너지/ 의지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쓰나미는 미움이고 잔잔한 파도는 애정인가. 나는 아직 아무런 상(相)도 확실하게 내어주지 않는 0과 무(無)의 의미를 담은 바보 카드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먼지는 먼지의 자리에, 쓰레기는 쓰레기의 자리에, 제자리를 찾은 고요에서 피어오르는 돌연한 회오리바람 같은
집중하면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편이다. 어떤 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이 퍽 순수하다고 느낀다. '순수'란 태생이 맑고 투명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몰입 그 자체로 들어선 모든 것들의 상태이므로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순수가 동반하고 하는 열정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는 '노력'을 위한 동일한 출발선을 제공하지도, '열정 1급 자격증'을 발급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열정은 순수와 동반해 일단은 모두에게 공평하기 때문이다. 봇짐을 매단 나무 막대를 삐뚜름하게 짊어진 카드 속 누군가는 아마도 지금 맹렬하게 몰두하고 있다. 치밀해 보이지도 않고 정교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하고 의문이 든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기에 설산을 등지고 발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창백한 태양에서도 선으로 표현된 에너지를 보내온다. 시간과 중력을 잊고 나 자신으로 가득차 있는, 저 사뿐한 걸음을 열정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끝이 절망이라도 다신 못 올 곳이라도 나를 잡아 끄는 이 길에 모든 걸 걸었어" -드라마 폴리스 OST 중에서
당분간 '자전거 탑승 포기자'로 살기로 하면서 자전거를 타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자전거는 참 묘한 탈 것이다. 천천히 발을 굴러도 옆으로 기우뚱 넘어지고, 폭풍처럼 질주해도 사고의 위험도가 올라간다. 그저 형편과 주제에 맞게 발을 움직이며 바퀴 두 개로 겸양을 아는 사람처럼 굴러간다. 바퀴살에는 어느새 바람이 깃든다. 잘 정비된 한강의 자전거 길은 계속된다. 그러나 바보 카드 속 길은 그렇지 않다. 일단 매끄럽고 탄탄하지 않다. 어쩌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등산객에게 펼쳐진 산길처럼 발자국의 흔적이 없고 그저 단단한 곳을 밟아가는 것이 최선인 듯한데, 그마저도 갈수록 상승세를 보이는가 싶다가 뚝 끊어져 멈췄다. 낭떠러지다. 카드 속 인물이 아래를 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애초에 시작의 근거나 이유가 '충동'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길을 알고 나온 출발이 아니라 충동이다. 한 걸음만 더 딛으면 극단이 완성된다. 떨어져 죽거나, 조금 낮은 지대에 기우뚱 서서 이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철이 들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현실은 낡은 전기장판 위에서 몸을 지지고 있지만, 언젠가 온수매트에 몸을 맡기리
한때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어찌나 어감이 강렬한지 나 역시도 가끔 깨기 싫은 꿈에서 눈을 뜨면 '역시 현실은 시궁창인가' 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바보 카드에는 화려한 무늬로 잘 꾸미고 차려 입은 인물이 강아지 수행비서까지 대동해서 '따란~!'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분명 이상세계를 경험하거나 최소한 꿈꿔보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의상과 몸짓의 디테일이다. 혹시 그는 진리를 찾기로 결심하고 초호화 저택과 가족의 품을 떠나기로 결심한 싯달타 같은 존재일까. 왼손에 살짝 그러쥔 하얀 장미를 보면 '염화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마땅히 바닥에는 레드카펫을 깔아야 할 터, 어째서 현실은 험준한 굴곡으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협소한 산길이란 말인가. 저 멀리 설산에는 천년이 우스운 '겁(劫)'의 지혜가 소복히 쌓여 있는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는 혹시 떠나온 곳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까. 여행의 시작 단계에서는 집 바로 근처에 사는 파랑새를 볼 수 없다. 산전수전을 겪고난 뒤 진심으로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할 무렵 그 청아한 울음소리가 들리곤 하니까. 우리는 이 인물을 애도하지도 응원하지도 말고, 이상과 현실 중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도 거두도록 하자.
엇? 이게 되네? 이후에 오는 지난한 길은 결코 슬럼프가 아닐 겁니다.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했던 사람이 있을까? 초심은 곧 달관한 마음과도 통한다. 초심에서 무언가를 조금만 더 알게 되어도 그때부터 우리는 바보 카드 속 인물이 된다. 비로소 제대로 시작하거나, 그러지 않을 셈이라면 미련 없이 판을 접어야 한다. 물론 '초심자의 행운' 으로 초기에 발현된 실력이 거짓은 아니다. 다만, 처음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따라, 그 설렘이 있던 기억을 안고 먼 길을 떠나야 비로소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문 것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완성의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
넌 멋져. 그것만 기억해. 그리고 힘을 내.
하루에 한 번, 마치 요가 동작처럼 바보 카드 속 인물의 포즈를 따라하면서 '난 멋져!'를 외쳐보는 것이 어떨까. 가만히 보면 운명도 아쉬운 사람에게 몇 조각의 빛을 더 나누어주는 것 같다. 시중에 다짜고짜 나를 일단 사랑하고 보는, 마치 생떼를 부리는 듯한 자기확언의 목소리들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용기란 소극적으로는 회피, 적극적으로는 망각이 선행되어야 나올 수 있는 그 어떤 물질이다. 병법 중 36계 줄행랑이 있는 것처럼 '아 몰라 됐고 난 잘해낼 거야, 멋있게!!!' 하고 우격다짐으로 먼저 치고 나오는 것도 내 안에 도사리는,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는 어둠을 따돌리는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직면하게 되겠지. 이제 길을 떠나는 바보 카드 속 인물에게 자기계발서는 잘 가려서 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