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더’에서 멈추기

by 써드

내지르는 쾌감이 있다. 보통은 넘어지곤 했다. 이제는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을 때 멈추려고 한다. 사랑이라면 이것보다는 더...에서 기대와 가능성을 닫는다. 모자라다는 감각으로 가끔 차올랐을 때 이게 맞다고 위안을 삼는다. 여전히 쉽지 않다. 우연히 시간을 떼우려고 간 쇼핑몰에서 지갑을 털리고 온다. 불안을 잠재우지 못해 오롯이 서기보다 스승이나 멘토를 찾고 싶어진다. 역할놀이에 휘말리거나 가스라이팅을 당하기 쉬운 상태다. 그나마 인지하고 있다는 게 다행일까.


도취는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두 사람의 만남이 이상에 도달했다고 서로 추켜세우며 엔돌핀이 발생한다. 사상누각일 때도 있고 진짜 특별한 제3의 유기체일 수도 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시간은 강철에 녹이 스미듯 보통을 특별하게 만들고 특별한 것을 보통으로도 끌어내린다. 알았던 사람 중에 간절히 망했으면 하는 커플이 있다는 것은 나의 비밀이다. 랩다이아 같은 공고함이 영원까지 두 사람을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니 숭고하기 짝이 없는 ‘원앤온리’가 어딘지 역겨움이 있었다. 그 사람들, 아직도 사랑하고 있겠지.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영원을 향해 있는 힘껏 배팅을 하다 처절히 망한 경험이 있기에 일종의 PTSD라 할 수 있겠다. 거창한 심술이지 뭐.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나의 금주 습관을 위해 이런 저런 의미를 붙이는 이유는 지속성을 위해서다. 오늘은 흐릿한 시야로 쏜살같이 보내는 취기의 시간이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다. 삶과 사랑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서도 조금 더 밀도 있게 살고 싶어진다는 게 동시에 가능한 일일까. 술과의 시간은 진흙구덩이에 빠진 자동차 바퀴를 힘껏 밀어올리는 행위와 같았다. 그러면 또 쌩쌩 달리는 내일이 찾아왔으니 저녁의 공허는 항상 고비였지. 오늘은 심지어 고기뷔페에서 단 두 번 정도 의식했다. 아, 소주가 없구나. 고기에 소주가 없을 수 있구나.


술을 얹으면 헛소리도 말이 되는 시간을 포기한 이유는 점점 취한 나 자신을 단도리하는 스킬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음주시대’ 말기에는 술에 취할 듯 말 듯한 순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주 반병이 하루치였다. 도대체 취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두 종류의 시간을 다 가지고 싶었다. 매일 마셔도 나 멀쩡하지? 하고 대여섯 병을 마시는 분들께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싶었나. 그렇게 경계에 머물다 보니 어떤 날은 내가 취한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진탕 마시고 뻗는 사람보다 약간 마시고 멀쩡하다고 되뇌는 내가 더 약아 보였다. 자각몽을 꾸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쓰고 싶은 욕망이 결국 이 글을 알콜 고해성사로 만들어 버렸지만 나는 꽤 잘 멈추고 있다. 시간이 아깝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는 아닐 텐데 이상하게 하루하루가 초침소리와 함께 흘러간다. 동시에 동면으로 보낸 몇십 년의 시간이 꽉 찬 돌직구로 뒤통수를 때리려다가 ‘사알짝‘ 스쳐 지나간다. 현타도 과하게 오면 좋지 않으니 내가 허리를 조금 숙인 거다. 그리고 넙죽 하고 운명에게 인사한다. 나는 이제 두 눈 똑바로 뜨고 너를 응시할 거다. 살아있다는 게 뭔지 샅샅이 훑어보고 돌다리를 두드릴 거다. 건너다가 한쪽 다리가 첨벙 빠지더라도 내 젖은 다리를 끝까지 응시할 거다. 돌다리 끝에 긴가민가 싶은 사람이 두 팔 벌리고 서 있을 때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때도 눈물 또는 웃음을 참고 무덤덤하게 서서 쉬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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