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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Sep 18. 2021

뭐라도 해야지

퇴사 후 삶을 씁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

퇴사 초반의 홀가분함과 여유로움은 사실 오래가지 않았다. 늘 바삐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굴리며, 뭔가를 해나가던 습관은 쉽사리 몸과 마음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려니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는 ‘할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적당히 소극적으로, 충분히 천천히 뭔가 ‘할 일’을 찾아봐야지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차茶 수업’ 포스터를 발견했다.  

   

건강 때문에 매일 달고 살던 커피를 끊은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커피가 없으면 하루를 제대로 깨울 수 없었고, 아침 출근길에 점심 후에 또 저녁에 친구를 만나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손에는 언제나 커피가 들려있었고, 책상 위에도 늘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놓여있었다. ‘커피 마시러 갈래?’라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좋았고, 적당히 소란스러운 커피숍의 분위기도 좋아했다. 심지어 건강 좀 챙기겠다고 한약을 지어놓고도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한의사의 말에 나는 커피 대신 한약을 포기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절대 커피를 끊는 날이 올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독한 역류성 식도염과 임신 준비는 커피를 향한 내 강력한 의지를 기어이 꺾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커피를 안 마시고도 나는 하루 종일 깨어있을 수 있었고, 점심을 먹고 나서도 굳이 커피를 찾지 않게 됐다. 다만 여럿이 함께 커피숍에 갈 때면 늘 곤란했다. 커피 말고는 골라본 적 없는 커피숍 메뉴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음료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차에 관심을 갖고,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              

처음에는 페퍼민트, 캐모마일, 로즈메리 등 익숙하게 들어본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점차 카페인이 없는 차, 생소한 이름의 차에도 관심이 생겼으며 그렇게 차에 대한 세계를 조금씩 넓혀 갔다. 그러다 보니 이름난 홍차를 구입하고, 유기농 차를 검색하고, 찻잔을 구입하고, 집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도 갖게 됐다. 또 그러다 보니 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집에서 5분도 채 안 되는 곳에 있는 카페였다. 커피숍인데 차 종류가 많구나 하며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차 수업을 한다는 포스터가 보이길래 용기 내서 문의했다. 그렇게 목요일 오전의 차 수업이 시작됐다. 손님이 없는 오전 시간이면 커피숍은 다도실로 바뀐다. 커피가 내려지던 테이블 위에는 다구들이 놓이고,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른 다양한 찻잎들이 가지런히 놓인다.

     

차의 기원, 종류, 만드는 방식 등 이론 수업도 물론 새롭고 재밌었지만,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차를 내리는 순간들이 참 좋았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뜨거운 물로 데우는 짧은 순간, 찻잎으로 뜨거운 물이 천천히 떨어지는 소리, 뜨거운 물을 만난 찻잎이 빙그르르 춤을 추며 품고 있던 색과 맛이 우러나는 그 순간이 말할 수 없이 평온했다. 작은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 찻잔을 들면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 입 속 가득 전해지는 온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그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맛과 향이 다른 다양한 차들을 다 기억하긴 어려웠지만, 차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한두 번의 경험만으로도 몸에 오롯이 새겨지는 듯 또렷하고 분명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차를 내리고 마시는 동안은 좋은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그 섬세한 규칙도 좋았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말들과는 멀리 떨어져 차와 함께 좋은 시간과 좋은 마음을 누린다는 것.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호사 같았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작은 순간이 마음을 채우기도 한다. 길을 걷다 얼굴로 스치는 바람을 만날 때가 그렇고, 작은 창으로 들려오는 옅은 빗소리가 그렇고, 할 일 없는 퇴사자의 아침을 채워주는 차의 온기가 그렇다.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 온전히 평온해지는 느낌. 지난 몇 년간 가져본 적 없는 소중한 순간이 차의 시간을 통해 전해졌다.

       

그래, 뭐라도 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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