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기(記) - 3
첫 입사를 했을 때 기뻤듯이 첫 이직을 했을 때는 더 기뻤다. 첫 입사는 세상에서 내가 필요한 곳을 찾았다는 기쁨이었다면 첫 이직은 내가 꼭 여기서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은 것 같았다. 마치 취준생 때처럼 '이 회사 말고 나를 받아 주는 곳이 없다니'라는 자괴감에 자존심이 박살 나고 있다가 한줄기 빛을 본 것 같았다.
또한 이직 시에 목표로 세운 네임밸류, 연봉인상에서 모두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은 더욱 컸다. 전 회사 동기 후배들에게도 너희도 빨리 떠나라며 밉상짓을 한동안 하고 마지막 면담에서도 당당한 더 큰 회사 직원처럼 너그럽게 굴고 나왔다. 퇴사 일자도 양측 회사에서 모두 배려를 해주어 한 달 정도 여유를 얻었고, 퇴직금 수령, 그동안 받았던 연차나 회사 지원금을 모두 정산하고 몇 번의 송별회를 거치고 나니 이제 다른 회사의 사람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몸도 마음도 새 사람이 되어 새 회사로 출근을 했다. 새 회사는 모회사가 있는 IT 회사였다. 한동안 일없이 한량처럼 지냈다. 뭘 하려고 해도 어차피 바쁜 시기가 올 것이니 그 시기를 잘 즐기라고 했다. 나는 매뉴얼을 잘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량처럼 잘 지냈다. 새로운 제도를 익히고 새로운 그룹웨어 사용법을 배우고, 인수인계 파일을 보고 점점 내일이 생겨나면서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새로 독립한 회사라 대부분이 경력직이라서 텃세나 적응에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운 곳에서 왔는데 상사와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 빌런을 만났어요라고 그의 만행을 적고 싶지만 그래도 브런치글을 쓰는 지..성인으로서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겠다. 내가 업무를 하는 방식과 상사의 방식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업무량과 상사가 생각하는 업무량이 달랐다. 당연히 나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고 상사는 그 일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상사는 내가 가장 많이 시간을 쏟는 일을 빨리 프로세스화 해서 정리해 버리길 원했고 나는 그 일이 정리되길 원하면 나 아닌 누군가가 필요했다.
결국 나는 업무를 하는데에 자원과 인력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상사는 퍼포먼스와 결과를 먼저 요구했다. 둘 다 서로가 요청한 것을 먼저 하기를 원했다. 나는 지원 없이 결과가 없었고 상사는 결과 없이 혹은 증명 없이 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상사는 내가 업무 결과 없이 버릇없이 군다고 생각했고 나는 정당한 요청이 권위로 묵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사람과 업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사는 아마 나를 교정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서로 괴로운 시간이 지나갔다.
상사는 때로는 나를 방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닦달하기도 했다. 나 역시 때로는 다 손을 놓기도 했고 때로는 상사에게 다시 잘해 보겠다고 하기도 했다. 서로 술한잔 하고 ”그래 앞으로 잘하자“, ”넵!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잘 해나가겠습니다!“. 도 했다.
사람이 완전히 100% 나쁠 수도 없고 100% 누군가가 잘못 한 일일 수도 없다. (물론 난 주관적이니까 내 잘못이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ㅋㅋ)
이 상태로 가다가는 상사는 지원을 안 해 줄 것이고 나는 현재 업무를 다 놓고 퍼포먼스에만 매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 상태로 가면 나는 퍼포먼스는 아무것도 못 내면서 불만만 많은 직원이 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때부터 2번째 이직을 준비했다. 이직한 지 1년을 채 못 채운 시점이었다.
이직 준비를 시작하자 회사에서 내 업무는 더 문제가 많아졌다. 상사는 이제 닦달을 떠나 괴롭힘과 업무지시 사이를 미묘하게 줄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긴장으로 인해 업무상 실수가 많아졌다. 업무 상 실수가 많이 짐으로 그동안 내가 주장했던 업무에 필요한 자원과 인력이 부족해서 퍼포먼스가 안 났다는 내 주장에 반대되는 근거들이 힘을 얻었다.
나는 그냥 업무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다라는 관점이 힘을 얻어갔다. 처음 예측했던 지원 없이 업무에 매몰되다 보면 결국 퍼포먼스를 못 내고 퍼포먼스를 못 내다보면 진짜로 업무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고 처음에는 내 편이었던 동료들도 결국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나의 예측이 그 실행 속도를 높여갔다.
연차와 연봉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직은 더욱 어려웠다. 면접을 보는 회사들도 이제 내가 연차도 높고 연봉도 높았기 때문에 점점 더 신중하게 나를 평가했고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점점 사내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사고뭉치가 되어갔다. 나의 자존감도 무너져 갔다. 몸은 점점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업무상으로는 이제 퍼포먼스를 떠나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 스스로 나를 돌아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닥쳤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빨리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점점 나 스스로도 내 능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이성적으로 상사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직을 하면 안 된다고 했고 이직처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직을 하면 또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일단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사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