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政通路정통루 라는 거리에 살았다. 상해는 예전에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장개석의 국민당의 정부가 있었고 국민당 정부가 있던 거리는 거리 앞에 정부’ 정’ 자가 붙어 있다고 J가 알려 줬다. 하지만 국공내전 시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가 갔을 때는 그 지역은 지하철도 닿지 않던 변두리였다.
다섯 개의 거리가 만나 오각장이라는 거리와 P대학의 중간 즈음 살던 J는 어두운 시장통에 있는 스튜디오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었다. 지금은 과장이 아니라 집세가 100배 정도 올라버렸다. 집값과 환율이 동시에 올라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서울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싼 월세였기 때문에 서울의 반 지하 방에 세 들어 살던 나로서 그의 스튜디오는 작긴 했지만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고 주방도 있는 부러워 보이는 스튜디오였다.
외관은 1960년대 어두웠던 중국의 기나긴 폐쇄경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파트였지만 내부 만은 성장하는 상해의 경제처럼 모든 것이 새로 단장했고 널찍했기 때문에 J의 집 월세 세배를 낸 나의 단칸 기숙사가 답답한 나는 J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소롱포 가게
그 당시 상해사람들은 10시만 되어도 거리가 어두컴컴해졌다. 밤 새 술을 마시는 나라에서 온 우리는 적응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교외의 한적한 대학 타운에서 그것도 캠퍼스와 조금 거리가 있던 J의 동네에는 늦은 밤까지 문을 연 곳 이라곤 소롱포 가게뿐이었다. 상하이는 소롱포의 본고장이다. 중국은 요리의 본고장으로 이름 높았지만 상하이는 그렇게 특색 있는 요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과 백오십 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어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롱포만은 상해 전통의 음식으로 전국에 퍼져 나갔는데 사실 이것도 상해 인근의 남상이라는 고을의 음식이다. 우리가 흔히 만두라고 부르는 있는 교자 만두의 절반정도 되는 크기이다.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빚은 작은 만두피 안에 야채와 민물 게의 살을 버무려 소를 채워 넣고 돼지비계를 소 안에 넣어 베어 물면 뜨거운 육수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물방울 주머니처럼 생긴 남상소롱포는 중국 남쪽의 딤섬과 북쪽의 국수에 대항하여 상해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요리이다. 지금도 상해 관광에 가면 꼭 들리는 관광지인 예원에서 관광객들은 줄이 길게 늘어서서 사 먹는다. 이제 소롱포는 중국 각지에 퍼져서 각양각색의 종류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편의점에도 냉동 만두로 만들어져 나왔다. 나날이 발전하는 상하이처럼 소롱포의 위상도 발전하고 있다.
소롱포 집은 대부분 24시간 운영되는 우리나라로 치면 분식집이나 김밥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롱포 한판에 12위안이었으니 그때 환율로 하면 한화로 1500원 정도였다. 이런 집은 아침 식사를 위해 두유와 비슷한 맛이 나는 콩 물인 또우장과 밀가루 튀긴 것인 요우티아오를 같이 팔았다. 맥주를 파는 집도 있었고 안 파는 집도 있었지만 냉장고에 넣은 맥주를 파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 모퉁이마다 한 개씩 있는 이런 작은 분식점은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아침거리를 팔았고 점심 저녁에는 간단한 요리들을 팔았다. 저녁 이후로는 야식을 팔았는데 항상 졸려하는 종업원이 졸린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중국에도 영국 프리미어 인기가 높았는데 축구경기를 보는 사람들과 나와 J처럼 야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24시간 영업을 하였기 때문에 새벽까지 잠 못 들던 J와 나 같은 청춘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저렴한 야식을 제공하는 안식처였다. 술을 마시다가 속이 허해지거나 밤중에 갈 데가 없으면 이런 소롱포 집에 가서 12개 한판을 시켜 중국식 국자 같은 숟가락에 올려놓고 뜨거운 육수를 터트려 불어 먹곤 했다.
훈이형
어느 날 J는 우리의 단출한 모임에 한 명을 더 추가했다. 그 당시 나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선 한국인들과 교류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맹신했고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떠날 날이 예정된 어학당의 학생과 지속적인 교류를 해줄 교민들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친구는 J 뿐이었다. J는 대학생활을 거기서 해야 했기 때문에 한국 유학생들과 두루두루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의 격투기 취미를 같이 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새로 사귄 친구들은 용일이나, 지희, 현주처럼 J의 친구들이었다.
훈이형도 이런 J의 친구 중에 하나였다. 나의 대학 선배이면서 상해에서 P대 대학원을 다니며 J와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는 훈이 형은 우리 모임에 녹아들었고 훈이형 역시 반사회적이고 어둡고 비뚤어진 면을 가진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 셋은 곧 똘똘 뭉쳐서 어두운 정통루 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 후배님이야? 반가워”
“안녕하세요? J한테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같이 운동을 하신다고…”
“어 그래 뭐 남자들끼리 이런 구질구질한 데서 보냐 우리 택시 타고 시내로 나가자 엉아가 좋은데 알려줄게”
훈이형은 우리가 시켜 놓은 바이웨이 맥주를 다 비우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뭐 시내는 다 가봤을 것이고 첫 만남부터 클럽을 가긴 그렇잖아? 구베이 가봤니? 한인타운 있는데? 거기가 또 멋져 나중에 너네 중국 관련 취업하게 되면 구베이 이런데 잘 알아 놔야 접대도 가능한 거야”
훈이형을 따라 처음 가본 구베이는 상하이 안의 일본이었고 상하이 안의 한국이었다. 훈이형도 역시 우리와 공유하는 어둠이 비슷했다. J와 나의 성격에 어둠이 드리운 원인은 비슷했지만 훈이형의 어둠의 근원은 알지 못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던 훈이형은 중국어도 금세 배워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경영학의 마스터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언어 감각이 있어서 독학으로 두 개의 언어를 금방 깨우친 형이었지만 경영학이라는 학문을 전혀 배워 보지 않는 나로서는 경영학을 가르쳐줄 스승은 영 잘못 골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생기고 자신만만한 훈이형은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 같았고 나와 J는 형을 존경하고 따랐다.
J는 사랑에 실패했고 나 역시 그즈음 하루에 부재중 전화를 30통씩 해도 여자친구가 어쩐지 전화를 안 받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우울한 상태였다. 훈이형 역시 첫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모여 우리의 비애를 술과 비행으로 달래고 있었다.
J는 이미 퇴폐의 분야를 통해 자신과 첫사랑에게 복수 중이고 나는 만취해 기억도 나지 않은 채 부재중 전화를 30통을 찍고 싸이월드에 긴긴 글을 공개적으로 쓴 뒤 다음날 깨어난 맨 정신의 나에게 치욕을 안기는 방법으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진실한 마음이 영화처럼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듯이 그녀에게 닿아서 깨어진 사랑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선 사랑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술과 방탕함에 던져 넣었고 훈이형은 중국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연애를 하며 동거를 하며 계속해서 짧은 만남을 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첫사랑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훈이형도 J도 격투기와 사랑이라는 방법을 통해 청춘의 블루스 스텝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J와 훈이형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J가 폭력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고 증명하려는 느낌이라면 훈이 형은 자신을 시험하고 한계에 밀어붙이고 남을 압도하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에 있어서도 J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닥쳐온 사랑 앞에 항상 헐떡임과 조바심이 느껴졌다면 형은 노리고 있는 사냥감을 쫓으며 가끔 손쉬운 사냥감에게 잔인한 분풀이를 하는 맹수 같은 본능이 느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춘이라는 리듬에 어두운 감정과 격렬한 몸짓으로 반응한 우리 셋은 소롱포와 양꼬치를 잘근잘근 씹고 칭따오와 바이웨이 캔맥주를 물처럼 마시며 우리의 감정적인 불안정이 모두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여자들과 썩어빠진 이 세상 때문이라며 마치 부인의 부정을 목격한 아라비안 나이트의 술탄들처럼 세상을 향한 지하드를 선포했다. 우리의 지하드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자신과 주변에 테러와 같은 일탈을 하며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로 치장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훈이형은 여자친구와 동거를 했기 때문에 J와 나처럼 자주 보지는 못했다. 할 일 없이 소롱포집에서 만난 어느 날 J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