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시간의 기차여행

바라나시에서 첸나이로 가는 길

by Girliver

바라나시 무갈사라이 역에서 첸나이 센트럴 역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구간이 아니어서 온통 인도 사람들 뿐이다. 늦은 시각 컴컴한 플랫폼에서 혼자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이미 "나의 좌석"이 지정된 기차에 올라야 편해질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현지인들도 장거리 이동이 많은 듯 커다란 짐을 가지고 기차에 오르는 인도인들이 대부분이다. 좌석번호를 찾고 보니 같은 칸에 가족을 포함한 여자들이 있는 것도 위안이 된다.


내 자리는 이층으로 나눠진 창가 쪽 위층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불편하지만 아래보다는 위층이 더 안전해서 그렇게 예매해 두었다. 큰 배낭을 아래층 의자 밑에 묶고 있는데 누군가가 배낭을 내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나와 같은 여행자다! 이 많고 많은 인도인 틈에서 동양인 여행자와 위아래층을 같이 쓰게 된 것이다. 기차 예매할 때 직원이 그렇게 배치해 준 게 아닐까 싶다. 기차를 기다리며 여행자를 한 명도 못 봐서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우연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건 행운이다.

온종일 흔들리는 기차 안에 있다는 것은 죽도록 힘든 일은 아니지만 무료한 일인 건 확실하다. 혼자 38시간을 어떻게 가나 했는데 같은 여행자인 동행을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니 숨통이 트인다. 이야기해 보니 미키는 미국에 사는 홍콩 출신 중국인 뮤지션이다. 손질도 잘 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에 깡마른 체구지만 씨익 미소 지을 때면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그에겐 커다란 배낭과 작은 배낭 말고 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쿨렐레다. 심심한데 한 번 연주해 달라고 하니까 이런 분위기에선 싫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사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차 안은 어수선 그 자체라서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우쿨렐레 연주자다. 지금은 인도의 벵갈루루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러 가는 중이라고 한다.

밤차라서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가 부스스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한다. 아침인사를 하는 미키가 마냥 반갑다. 나는 바라나시에서 첸나이까지 38시간을 가는데 미키는 한술 더 떠서 벵갈루루까지 46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한다. 온종일 지나치는 풍경을 보다가 심심하면 이야기도 나누며 준비해 온 과일, 과자도 나누어 먹는다. 화장실에 갈 때도 서로에게 짐을 맡기고 다녀오면 되니 편하고 걱정이 없다. 긴 기차여행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동행을 만나다니,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도 나를 행운이라고 여긴다.


건장한 스물두 살인 미키는 기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도 해준다. 평상시에 음식을 먹는 양이 적은데다가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물과 비스킷, 과일로 버티는 내 모습이 그에게는 안돼 보이는 것이다. 그런 그의 염려가 나는 고맙기만 하다.

미키와의 대화가 무료해질 무렵에는 기차의 옆 칸에서 어떤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달려와 말을 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한국은 어디에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호구조사를 한다. 귀여운 이 소녀는 12살이고 부모님과 오빠와 첸나이에 가는 중이다. 그녀의 좌석은 옆 칸에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를 보고 따라왔다고 한다.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고 오빠는 왜 안 오냐니까 오빠보다 자기가 영어를 잘한다며 자랑한다. 소녀는 야무지고 귀엽다.


같은 객차 안의 어른들이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는데 비해 소녀의 호기심은 당돌하기까지 하다. 소녀는 기차에 있을 동안 서너 번을 더 내 자리로 놀러 온다. 한 번은 부끄럼쟁이 오빠를 기어이 끌고 와서 인사를 시킨다. 또 한 번 왔을 땐 내가 미혼이라고 하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인도에서는 여자가 열여덟이면 결혼을 하는데 이상하다며 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한다. 다시 왔을 때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볼펜과 엽서를 배낭에서 꺼내서 선물해주니까 고맙다며 가족들에게 자랑하러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간다. 소녀 덕분에 무료한 시간이 메워진다.


다시 한 번 밤이 온다. 잠이 안 오지만 좀 일찍 자리에 눕는다. 객차 안의 소란스러움은 점차 잦아든다. 어둠이 내린 길 위를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나시에서의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뒤척이며 잠 못이루다가 우연히 바라나시에서 만난 스물두 살짜리 청년 세 명을 생각하게 된다.


구두는 갠지스강의 가트에서 배를 젓는 보트맨이고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다. 료는 교사 부부의 아들로 일본의 명문대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미키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국인인 뮤지션이고 음악교육을 한다. 그들을 동시에 만난 것은 아니다. 밤에는 바라나시의 호텔에서 료와 일본 친구들과 술 마시며 웃어댔고 아침이나 낮에는 가트에서 구두와 이야기를 하거나 강변을 걸었다. 교육도 못 받고 거리에서 자란 구두는 읽고 쓰는 건 못해도 영어 일본어를 먹고 살만큼은 구사하고 한국어도 몇 마디는 안다. 료는 영어공부가 부족하다며 다음 달엔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한다. 미국 사는 중국인인 미키는 자기가 홍콩 사람이라 영어 발음이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들 셋의 스물두 해, 그 각자의 삶이 이 밤 흔들리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교차된다. 생각해보면, 삶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눈 앞의 현실을 무시한 사람일까? 아니면 용기 있는 사람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깊이 잠들 수도 깨어있을 수도 없는 몽롱한 밤, 자꾸만 가난하고 형제 많은 구두가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구두는 분명히 괜찮다고, 바라나시가 좋다고 했는데... 괜찮다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권리가 내게 있을까?


기차는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그 어딘가에 있을 나의 목적지 첸나이를 향해, 더 먼 어딘가에 있는 미키의 종착지 벵갈루루를 기약하며... 온종일 흔들리는 기차, 흔들리는 사람, 흔들리는 생각.


그렇게 두 번째 밤이 지나고 드디어 첸나이가 가까워 온다. 내가 내리고 나서도 여덟 시간을 더 흔들려야 하는 미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노 프라블럼"이라고 인도 사람 흉내를 낸다. 거의 2박 2일(!)을 같은 공간에서 지냈더니 몹시 가깝게 느껴진다. 작별인사하는 그의 사진을 찍으니 페이스북에 올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제 세상은 끊어질 수 없는 망으로 연결되었다. 지구촌 어디에 있어도 페이스북이든 이메일이든 지속적으로 연락 가능한 스마트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누며 남은 여행 잘하라고 서로의 등을 두드린다. 배낭을 지고 선 나에게 이틀 새 수염이 더 자라난 미키가 말갛게 웃으며 안녕을 고한다.


기차가 멈춘다. 미키를 태운 기차는 벵갈루루를 향해 멀어져 간다. 이로써 서른여덟 시간의 기차여행이 끝난다. 만일 미키와 기차 위아래 칸을 쓰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주인공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는 동화 속 요정처럼 여행길이 외롭고 힘들 때 등장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나도 그런 존재였을까?


다시 배낭을 메고 땅을 딛는다. 훅하고, 남인도의 더운 바람이 불어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