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아이 육아 국룰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Rule
'내성적'이라는 수식어에 꼭 붙어 다니는 단어가 하나 있다. 여러 단어들이 있겠지만, 내가 발견한 그 단어는 '고민'이다. 회사원인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고민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내 딸이 내성적이라 고민이고, 중학생 내 아들은 더욱이 내성적이면 안된다. 어쨌든 내성적인 성격은 그 자체로 고민이 되어버리는 게 바로 우리 사회다.
기질적 흙수저, 그게 바로 내향인들이다.
내향인들은 오래전부터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외성적이다는 말은 없다.
외향적이시네요!
내성적이시네요.
두 문장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전자에는 느낌표가 붙어야만 하고 후자에는 마침표가 붙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외향적이다라는 말은 칭찬의 의미이고, 내성적이다라는 말은 왠지 야단 같은 느낌이 든다. 내향인의 피해의식인걸까?
어쨌거나 피해의식을 느낀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내향인들은 오랫동안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존재해왔다는 의미를 가진다. 나는 내성적인 나의 기질 자체를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했고, 나 스스로도 무시해왔다. 내성적인 성격은 쓸 데가 별로 없지 않나? 하는 생각들을, 치킨엔 맥주를 떠올리듯 아무런 의심 없이 했다.
문제는 내향인들이 부모가 됐을 때 생긴다. 내성적이라는 이유로 주변인들의 걱정을 받았던 나는 아내의 임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초조했다. 혹시나 날 닮은 아들일까봐. 사내 녀석이 그렇게 내성적이어서 어따 써? 하는 생각을 내가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조금 안도했다. 내 모습을 투영하지 않고 잘 키워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딸의 이름을 지을 때 나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 고민했다. 작명소 3군데를 갔는데 '포브스 선정 요즘 유행하는 이름 1~10위' 정도의 이름들을 받았다. 내 주변의 수많은 이름들을 떠올리며, 나는 성명학을 공부해서 딸의 이름을 지어줬다. 내성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취적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글에서 언급하는 딸의 이름 다람이는 가명입니다.)
아이가 돌을 지나 걷게 되고, 두돌을 지나 그네를 타고, 세돌을 맞아 자기 주장이 생길 무렵 나는 깨달았다. 내 딸은 아빠인 나의 성향을 아주 많이 닮았다는 걸. 네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은 아이가 눈을 꼭 감고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을 선물로 달라고 소원을 빌 때, 나는 딸이 나를 닮지 않게 해달라 빌었다.
육아는 어린 나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한 자아가 있다는 개념에서 출발한 '내면아이' 라는 용어를 상담심리학에서는 실제로 쓰고 있다. 나는 내면아이를 매일 직면했다. 내성적인 내가 성취해온 것들도 꽤 많았는데 왜 스스로에게 모질었는지를, 육아를 공부하고 글을 쓰며 살피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해하게 됐다.
딸의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금 나는 더 이상 나를 닮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딸이 나를 닮아서, 내가 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내성적인 아이 육아에 국룰이 단 하나 있다면,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
인정해주면 그다음은 쉬워진다. 나도 내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한층 성장했다. 아빠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오히려 성장했다. 아빠의 마음이 편해지자 딸의 변화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인정하면서부터 나는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려주게 됐다. 아이의 모자란 부분을 인정하고 기꺼이 인내하며 채우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나는 이제 딸에게도, 나에게도 모질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너그럽다.
내성적인 아이의 부모가 더 이상은 모질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도 내성적인 사람에게 더 이상은 모질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