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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치의 장지혜 Sep 30. 2022

왼발잡이 고무줄놀이 고수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때

우리 동네 고수는 왼발잡이였다. 손도 아니고 보통 일상생활에서 누가 왼발잡이인지 오른발 잡이인지 알 리가 만무하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우리는 그때 고무줄놀이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다. 

넘치는 에너지 때문이었는지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놀이 치고는 매우 전투적이고 치밀했으며 그 중요하다는 간식보다 더 우위에 있었으니 그 정도면 말 다했다. 


때는 국민학교 티를 못 벗어서 어설프게 교복을 입은 꼬꼬마 중학생 때였다. 작은 학교여서 그랬는지 국민학교 때도 뭔가 놀이 하나 유행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다 같이 그것 에만 몰두하던 때였다. 공기놀이도 그랬고 팽이치기도 그랬고 선생님들에게 들키는 족족 압수되었던 원카드 놀이도 그랬다. 고무줄놀이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흔해 빠진 유행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다른 놀이와는 달리 고무줄놀이는 감내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일단 복장부터 갖춰져야 했고, 그래 봤자 체크무늬 교복 치마 속에 자주색 체육복 바지였지만, 그 짧은 쉬는 시간에 3층에서부터 뒤 운동장까지 쏜살 같이 튀어 나가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놀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그 열기는 꽤나 오래갔다. 어느 한때의 유행이 될지 언정 우리는 열정을 다해 즐겼다. 누구 말마따나 미쳐 있었다. 어디서 그렇게 에너지가 솟아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이 되는 거라 생각했는지 선생님들도 크게 저지하지 않는 눈치였다. 


“시, 시, 시작.”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거의 전교생이 종이 치면 우르르 몰려 나가서 고무줄놀이를 했다. 유행을 좇는 청소년기의 습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고무줄놀이로 운동장을 한가득 메우곤 했다. 각자 반별로 또는 친한 친구들끼리 암묵적 자신들 만의 자리에서 모두들 뛰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매우 건전한 문화였던 것 같다. 

두 명은 줄을 잡고 나머지는 대형을 갖췄다. 편은 일전에 이미 나눠 놓았다.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일제히 뛰기 시작한다. 얼마나 여려 번 해봤는지 발이 딱딱 맞는다. 그러다가 누구 하나가 고무줄을 놓치면 그 사람은 아웃이다. 왼발잡이 고수는 항상 센터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았다기보다 우리 모두가 그 자리를 내줬다. 잘하는 사람이 중심에 있어야 모두들 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고무줄놀이는 서로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한 놀이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놀이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외국인들이게 한국 전통 놀이를 소개하면서 고무줄놀이 체험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외국인들은 굉장히 열심히 고무줄을 건들지 않으려고 다리를 과장되게 벌리면서 폴짝폴짝 고무줄을 넘어 다녔다. 그 시커멓고 연약한 고무줄이 마치 무시무시한 레이저빔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떻게든 건들지도 않으려는 몸짓이었다. 그러고 나서 인터뷰할 때 하는 이야기가 

“오우. 이거 정말 재밌어요우.”

였다. 정말이지 ‘리얼리?’하고 되묻고 싶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고무줄을 허들 마냥 건너뛰기만 해서 고무줄놀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저 방송용 멘트였단 말인가.

‘아니야. 그건 아니지.’

고무줄은 고무줄의 탄성을 이용한 놀이이다. 그 말인 즉 다리와 고무줄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무작정 피하기만 할 것이면 그냥 끈을 이용하는 것이 낫지 굳이 탄성이 있는 고무줄을 이용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소개하는 리포터가 너무 못 미더웠다. 


지금도 고무줄놀이 소개 유튜브 영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서서 고무줄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방향이 바뀌게 되면 배우는 입장에서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진정한 고무줄놀이에서는 지그재그 대형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무줄은 탄성으로 인해 말려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지그재그 대형만큼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낙오자가 생기게 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열외로 하고 시작할 때는 무조건 서로 엇갈리는 대형을 선다. 


고무줄놀이의 시작 대형의 배치


이렇게 서게 되면 고무줄이 발에 걸리기 시작하는 순간 반듯했던 고무줄이 지그재그로 좍 늘어나는 것을 움직일 때마다 종아리 사이로 느낄 수 있다. 이 느낌은 감히 홍해가 쩍 하고 갈라지는 순간의 느낌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순간의 희열이 그 첫 번째 매력 포인트이다.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는다. 우리는 하나이고 서로 협력하여 이 노래를 마친다. 다름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지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한다. 네가 없으면 이 고무줄은 위쪽으로 말려 올라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고무줄놀이의 대형에 따른 줄의 변화


고무줄놀이는 단계가 있다. 발목에서 시작해서 무릎, 엉덩이, 허리, 겨드랑이, 귀, 머리, 만세이며 난이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 한 줄 고무줄만 했기 때문에 주로 무릎에서부터 시작했다. 고무줄 잡이는 주로 키 큰 아이들의 차지였다. 고무줄의 높이에 따라서 고무줄을 넘거나 걸거나 감는 발의 위치와 기교가 달라진다. 


고무줄놀이의 단계


오른손잡이가 더 많은 것처럼 대부분은 오른발 잡이이다. 모두가 오른발 잡이일 때의 대형은 크게 어려운 점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중에 제일 잘하는 고수가 왼발잡이였다는 점이다. 서있는 방향이 반대가 되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끼리 헷갈리기 십상이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아가는 방향이 반대라면 무의식 중에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었으니 우리는 아구가 딱딱 맞는 완벽한 팀플레이를 이룰 수 있었다. 


오른발 잡이와 왼발잡이의 서 있는 방향의 차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한 아무리 단계가 올라간다 하더라도 대체로 무난하게 고무줄을 뛸 수가 있다. 그런데 한 명씩 빠지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로를 지탱해 주던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고무줄은 그야말로 힘이 쫙 빠지면서 낭창낭창해진다. 어떻게든 무릎 아래 걸어 놓고 뛰어야 다루기가 편한데 고무줄은 자꾸 위로 말려 올라가려고 한다. 이렇게 다루기가 어렵게 되었을 즈음이 대게 고수가 홀로 남아있는 시점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수가 살기를 기도하며 장엄하게 바라본다. 그러다가 성공이라도 하면 환호성이 들리며 모두들 후다닥 자리 정렬을 한다. 어김없이 줄은 한 단계 올라간다. 한 명이라도 살아야 모두들 다음 단계에서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 (규칙은 그때그때마다 달랐다.) 혼자 남겨졌을 때 말려 올라가는 고무줄을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도 않은 채 다리를 높이 들어 확 낚아채는 것을 보면 팬심으로 심장이 쿵쾅쿵쾅거린다. 괜히 고수가 아니다. 최소한의 점프와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고난도의 기교를 성공시킨다. 역시는 역시다.


왼발잡이 고수는 평상시에는 조용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귀밑 1센티의 단발이 눈까지 덮여 있어서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크지 않은 키에 그저 잔잔하게 흩날리는 검은 생머리에 반쯤 가려진 하얀 피부에 코만 보였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고무줄을 할 수 있도록 교복 치마 속에는 항상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조용하게 팔자걸음을 걷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고수는 폴짝폴짤 뛰지 않았다. 마치 무림의 고수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날렵하게 고난도의 기교를 선보였다. 뒤로 고무줄을 다리를 거는 동작이 있다. 대부분 폴짝 뛰어서 걸곤 하는데 그 마저도 고수는 달랐다. 뒤를 한번 힐끔 보더니 놀랄 만한 유연성으로 우아하게 다리를 뻗어 고무줄을 사뿐히 걸쳤다. 진정 무림의 고수 다웠다. 고무줄 고수의 실력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얼마나 봤으면 지금까지도 그 모습들이 생생히 그려진다. 


말이 없었던 나와 나보다 더 말이 없었던 고수. 우리는 비슷하게도 스몰 토킹을 어려워하는 처지인지라 끝내 많은 대화를 해보진 않았지만 늘 같이 고무줄놀이는 즐기는 사이였다. 어디서 배워오는 건지 감기와 같은 현란한 기술이 필요한 까다로운 고무줄놀이는 늘 시범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머릿속에는 거울일 필요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홀로 <바다>를 뛰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기억은 사선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담고 있으며 뿌옇고 늘 슬로모션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애틋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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