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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치의 장지혜 Sep 30. 2022

미국에서 온 전학생

고무줄놀이에 임하는 전투적인 자세

국민학교 시절, 보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비가 오는데도 굳이 고무줄놀이를 하겠다면 나와 친구들은 점심시간에 밖에 나왔다. 두리번거리다 천막이 쳐져 있는 씨름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기로 했다. 알다시피 씨름장은 모래가 쌓여 있어 발이 푹푹 꺼져서 고무줄놀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국민학생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 넓지도 않은 공간에서 고무줄을 하다가 기어이 사고를 쳤다. 좁아서 간격을 많이 못 벌린 탓에 다리를 올리려다 내가 내 뒤에 서 있던 친구의 턱을 정통으로 친 것이다. 무언가 다리에 부딪힌 것을 느꼈던 순간 흩날리는 모래 알갱이와 함께 나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다행히 혀를 씹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엉엉 울었고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비는 오지 친구는 울지 자책했던 시간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힘차게 다리를 올리며 불렸던 그 노래가 바로 <전우야 잘자라> 였다. 가사의 의미도 모른 채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그때의 민망한 기억 때문에 다시는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다.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말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우리의 고무줄놀이 사랑은 계속됐다. 

“니들 또 종 치자마자 튀어나가 고무줄놀이하려고 준비하는 거지? 아 기여 아니여?”

선생님은 교탁 너머로 내다보시며 책상 밑으로 한 발씩 뻗어 나와있는 다리를 쳐다보고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으셨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앞을 다투어 우르르 튀어나가기 바빴었다. 우리는 비장했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쉬는 시간 10분에 목숨을 걸었다. 3층에서부터 뒤 운동장까지 튀어나가 노래 두어 개는 끝내고 다시 들어오곤 했다. 점심시간에는 다소 좀 여유가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두들 뛰니 나도 뛰었다. 누군가는 열심히 뛰고 누군가는 목청이 터져라고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우리 전학생도 같이 데려가 봐. 가르쳐주면 잘 할꺼여. 전에 학교에서 치어리더 출신이었디야.” 

선생님은 늘 넉넉한 충청도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전혀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일종의 추임새처럼 ‘기야?’라는 말은 달고 살았다. 우리는 그걸 ‘여야의 차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의 ‘기여’와 우리가 쓰는 ‘기야’ 간의 차이랄까. 


그나저나 선생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을까? 전학생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치어리더였다니. 내심 미국에서 온 전학생이 한국의 빽빽한 중학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숫기가 없어서 잘 다가가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나마 부디 잘 적응해달라고 응원을 했었던 건 전학생이 늘 말이 없어 보이고 좀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더 걱정스러웠다.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으니 그날은 전학생도 처음으로 우리와 함께했다. 미국에서 왔다는데 너무나도 한국적인 고무줄놀이가 잘 맞을까 염려스러웠지만 말보다는 몸을 쓰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서툴지만 수줍게 친해지기 위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평상시 고무줄놀이에서 주로 가장 먼저 했던 노래는 우리가 흔히 ‘전우의 시체’라고 불렀던 <전우야 잘자라> 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비장한 곡이었다. 단순하고 쉬운 편이었고 군가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전의를 다지기에 좋았던 것 같다. 

전학생에게 제일 먼저 <전우야 잘자라>를 알려주기로 했다. 고수는 시범을 먼저 보이다가 살짝 멈칫하는 눈치였다. 왼발잡이였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나 보다. 헷갈릴 법도 한데 방향을 바꿔도 고수는 고수인지라 곧잘 했다. 고무줄놀이를 함에 있어 한국말과 영어가 섞인 어색한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저 목청껏 부르는 노랫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도 충분한 소통이 가능했다. 


이제 보니 가사가 다소 낯설다. 줄을 넘고 뛰어다니면서 우리는 왜 목청껏 가사를 바꾸어서 불렀던 것일까. 최근에 원고를 정리하면서 원곡 가사를 검색하여 찾아보니 뒷부분의 가사가 우리가 불렀던 가사와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마지막 부분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일 년 삼백 육심 오일. 사라진 전우여. 전우여!’는 도대체 어디서 온 가사란 말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직까지 그 가사가 찰거머리처럼 입에 딱 붙어서 원곡의 가사가 너무 어색했다.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가사로는 불러지지 않으니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 같다. 마음속으로 약간의 미안함과 뻔뻔함을 간직한 채 끝까지 우리가 아무렇게나 붙인 노래 가사로 밀고 나갔다.  


고무줄놀이의 노래들은 대게 8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8박의 의미는 한 소절의 길이이며 대게 4분의 4박자 곡들이다.) 처음 시작 포지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줄을 다시 사이에 두지 않고 옆에 서서 양 발을 구르면서 시작하는 노래들이 대체로 쉬운 노래들이었다. 양 발을 구르고 나서 왼발 찍고 오른발로 고무줄을 넘고 넘은 후 빙 돌아 반대편까지 가서 다시 뛴다. 이 반대편으로 달려가 동작이 이 노래의 핵심이다. 줄이 길어졌을 때 반대편까지 뛰어가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한 번에 대략 8명 정도 뛰었으니까 그에 맞게 줄 길이도 상당했다. 박자에 맞춰 도착하려면 전력질주를 해야만 했다. 난이도가 쉬운 고무줄놀이였지만 이렇게 뛰어가는 게 귀찮아서 싫어했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전우야 잘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에 맞춘 고무줄놀이 발 동작. 박자에 따라 동그라미 하나에 가사 한 음절씩 넣어 부르며 발 동작에 맞춰 뛴다. 


도식에서 고무줄을 직선처럼 그렸지만 사실 직선이 아니다. 탄성이 있기 때문에 상하좌우 움직임이 매우 다채롭다. 제 멋대로 가는 고무줄을 원하는 방향으로 다스리기 위한 여러 가지 스킬들이 있다. 낮은 단계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다. 양 옆의 대형을 잘 맞추면 홍해가 갈리는 희열을 느낄 수 있고 반대편까지 뛰어가는 것도 약간의 귀찮음만 있을 뿐이지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단계가 올라갈수록 양 발 구르기 이후 처음에 고무줄을 걸치는 것부터가 고비이다. 무릎 높이에서는 뒤로 걸던 고무줄을 엉덩이나 허리 높이부터는 다리를 앞쪽으로 올려서 걸어야 한다. 그냥은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겨드랑이나 귀 높이만큼 높아지게 되면 아예 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준비자세를 취한다. 그리고는 다리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줄을 건다. 이 방법이 머리까지는 먹힌다. 그런데 만세에서는 아무리 다리가 긴 사람도 헛스윙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만세에서만 손으로 줄을 내리누르는 것을 허용했었다. 이렇듯 같은 동작도 줄 높이에 따라 난이도가 다른 동작이 된다. 


고무줄 높이에 따른 걸기 동작의 차이


전학생은 곧잘 따라 했다. 그래서 고수는 매일 조금씩 알려주기로 했다. 전학생이 다이어리에 끼워진 사진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우리는 초보의 수준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고수보다 더 고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학생의 다이어리 안에 꽂혀 있던 사진에는 멋진 유니폼을 입은 치어리더들이 탑처럼 대형을 이루고 있었고 그 가운데 떡하니 전학생이 일자 벌리기 자세로 양팔을 벌린 채 공중에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하이틴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사진을 보고 나서는 괜스레 머쓱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 전투적으로 고무줄놀이에 임했던 걸까. 투박한 고무줄의 어떤 매력이 우리를 그토록 잡아당겼던 걸까. 지금도 그와 같은 힘이 발휘될 수 있을까. 정말 한때의 유행이었을까. 당시 모두를 휘어잡았던 고무줄놀이의 마력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다. 찾아서 ‘여기 있소’ 하고 두 손 가득 담아 바치고 싶다. 


30여 년이 지나 다시 한번 미쳐본다. 이번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곧 죽어도 하기 싫었던 바로 그 유산소 운동을 고무줄놀이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상에 젖은 추억의 한 편으로 치부하기에는 무척이나 계획적으로 고무줄이 임해 본다. 예전 같지 않은 몸뚱이를 살살 달래 가며 유산소 운동을 시키려면 슬프게도 그래야만 했다. 


 왁자지껄 떠들썩했던 시간들을 뒤로한 채 이제는 철저히 홀로 곧고 검은 고무줄 앞에 선다. 다른 사람은 없고 오직 나와 내 잎의 고무줄뿐이다. 혼자니까 조금 못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몸이 기억하는 동작에 맞춰 저 선 너머의 쌩쌩했던 나를 다시 만난다. 모두들 없지만 늘 같이 존재하는 듯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여행이라고 부른다. 무겁고 출렁이는 살들이 둔탁하게 느껴지지만 괜찮다. 나는 전진한다. 우리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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